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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 자료실

 

동작권 남자부장 안상진입니다.
올해 1월 서울9방면 발대식 당시 제가 글을 쓰고 김영준 지부남자부장께서 ppt를 제작해서 발표한 자료입니다.
본부에서 검토된 적 없는 자료입니다. 여기에 올려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노트북을 정리하다가 혹시 필요한 분이 계실까 해서 올립니다.

상당히 이론적이라 이의 일념삼천과 같이 혼이 빠져 있어 본질에 육박하는 자료는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투쟁의 혼을 불어 넣는다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삼대 회장의 치열한 투쟁 정신과 역사가 들어간다면 좋지 않을까요?
제가 마무리하고 싶은 주제이기도 하지만 게으른 자의 변명인 시간이 없어서...
혹시 추후 update하신다면 본 사이트에 다시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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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워드가 안 열린다고 하셔서 내용을 아래에 복사했습니다.
(꺽쇠 > 표시는 enter 를 의미. 명예칭호 180개는 200개로 고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사제(師弟) >
서울 9방면 발대식(2006.1.9)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계속해서 지식이나 지혜를 전달해 나갑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스승이라는 존재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자세와 노력에 따라 스승의 가르침은 훌륭하게 후대로 이어지며 또한 스승의 위대함도 증명이 되는 법입니다.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제 관계>
석존과 제자들과의 사제 관계>
창가학회의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선생님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으로 이어지는 엄숙한 사제 관계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사제 관계를 숭고하고 엄숙하며 후대의 모범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사제란 왜 필요한가? 불도수행에 있어 진정한 사제 정신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스승과 제자라고 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학교 선생님과 학생입니다. >
학교의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책이나 강의를 통한 지식의 전달이 주목적이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목적을 달성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불법의 師弟는 다릅니다. >
신앙은 생명의 법을 다루기 때문에 책이나 강의로는 스승의 위대한 생명의 경애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
불법의 목적인 경애 혁명, 인간 혁명을 위해서는 오직 스승과 제자의 혼의 교류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전력을 다해 그 가르침을 현실에 실현하고자 도전하는 행동 속에 자신의 경애를 열고 스승과 제자가 함께 행복을 쟁취해 나갈 수 있습니다. >

법화경 화성유품에는 > 재재제불토 상여사구생(在在諸佛土 常與師具生)이라고 해서 항상 부처의 땅에 태어나 스승과 함께 생을 받는다고 합니다. >
법화경 이전의 경들에서는 석존과 그 제자는 현세에 만난 사제라고 합니다. > 그러나 법화경에 와서는 석존과 그 제자들은 아득한 구원이래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며 과거 현재 미래세의 삼세를 관통하는 사제라는 혁명적인 사상이 설해집니다. 즉 불법을 구도하는 제자와 그 스승의 관계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걸친 사제이며 불가사의한 인연이 있는 것입니다. 이를 재재제불토 상여사구생이라고 명확히 선언한 것입니다.

그럼, 삼세를 관통하는 것이 불법의 사제라고 할때 그 사제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요? >

법화경 권지품에서는 석존이 다음과 같이 제자의 투쟁을 촉구합니다. > “나의 사후 법화경을 수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계속 수지한다면 모든 부처가 찬탄할 것이다. 그 사람 자신이 부처다. 자, 여러분 내가 죽은 후에 누가 이 법화경을 지킬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맹세의 말을 들려주지 않겠는가?” >
그러자 성문계의 제자들은 모두 겁을 먹어 다른 손쉬운 곳에서 불법을 넓히겠다고 후퇴합니다. 부처는 얼마나 노여웠으며 한심스러워 했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 이때 보살들이 나서 목숨을 바치는 홍교를 맹세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무쪼록 심려하지 마십시오. 부처가 입멸하신 후 우리들이 반드시 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설하겠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선근이 적고 만심이 많기 때문에 좀처럼 교화될 수 없겠지요. 그래도 우리들은 용감하게 참고 견디며 신명을 아끼지 않고 법화경을 끝까지 말해 가겠습니다.” >

이 장엄한 스승과 제자의 맹세의 모습이 바로 사자후입니다.
“師란 사장(師匠)이 수여하시는 바의 묘법, 子란 제자가 받는 바의 묘법 그리고 吼란 스승과 제자가 함께 부르는 음성” (법화경의 지혜)입니다. >
스승과 제자가 광선유포의 대원에 일어서 함께 행동을 일으켜 갈때 진정한 사자후이며 이 모습이 사제불이의 모습입니다. >

불법의 목적은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에 있으며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어본존을 확신하는 마음으로 절복 홍교를 실천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나 혼자서 또는 동료와 함께 불도수행을 해 나간다고 해도 > 올바른 스승이라는 규범이 없다면 > 또한 스승께서 몸소 보여주신 인간혁명의 모범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올바르게 실천해 나가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
이때 스승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스승은 지금 어떠한 제자의 투쟁을 바라고 계시는가? 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전진해야 합니다. > 사제불이야말로 불도수행의 전부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사실 우리는 이케다 선생님께서 실천해 오신 광선유포의 역사를 접할때마다 전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

전통의 ‘2월 투쟁’ 의 연원이 된 가마타 지부 투쟁(1952년 2월)
- 당시 지부별 절복의 한계인 한달 100세대를 돌파 201세대 절복 >
분쿄지부 투쟁(1953년) - C급 지부에서 최상위 지부로 >
삿포로 대투쟁(1955년) – 12명의 파견원과 함께 10일간 388세대 절복 >
오사카 투쟁 (1956년) – 한달간 11,111세대 절복 >
야마구치 투쟁(1956년) – 3개월에 걸쳐 22일간 459세대를 4,073세대로 확대 >
세계 190개국 광선유포(1960년~) >

전세계 식자와의 대담 1,600여회, 전세계 대학으로부터 받은 명예교수,박사학위 180개

우리는 이케다 선생님께서 절복의 스승, 세계 광선유포의 스승임을 잘 알고 있으며 위대한 철학자, 교육가, 사상가, 문학예술인, 반전평화주의자로서의 스승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그런 스승의 위대함이 오히려 이케다 선생님을 나의 스승으로 정하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지요? 나는 도저히 이케다 선생님과 같이 될 수 없다. > “스승은 스승이고 나는 나다” 라는 생각은 아닌가요?
또는 “너무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우상화 하는건 아닌가?” 라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지는 않는지요? >

“사제불이란 어본존을 근본으로 한 사제불이다”(인간혁명8권)라는 부분에서 명확하듯이 우리는 어본존을 믿는다는 입장에서 스승을 구도합니다. > 올바른 스승 덕분에 올바르게 불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처는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불성을 열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승과 같은 도전과 투쟁을 통해 스승과 같은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동지들이 서로 부처로서 존경하듯이 스승을 존경하는 것이며 스승과 같이 되기 위해 스승의 위대한 생명 경애에 더욱 부딪혀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상적인 겉모습만 보고 스승의 목숨을 건 투쟁과 제자의 피나는 구도의 숨결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상화라는 편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



개목초에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습니다. >
‘나와 더불어 나의 제자는 제난이 있을지라도 의심이 없으면 자연히 불계에 이르리라 …”
신심의 와중에는 당연히 난이 닥쳐옵니다. 그 난을 받고 겁을 내고 물러서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성불도 결정됩니다. 대성인께서 대난을 받으면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는 홍교의 일생을 보냈듯이 마키구치, 도다, 그리고 이케다 선생님은 투옥이 되는 대난을 받으면서도 역시 대성인의 제자다운 불퇴전의 신심을 관철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있습니다. 스승과 같은 마음으로 스승의 가르침과 행동을 현실에 실천할 수 있는가 그것이 사제의 관건입니다. >


나는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생애 단 한 순간도
적당히 해 두려는
나 자신을 용서한 적이 없었다.

나는 스승의 구상을 실현시켜 갈 것을
나의 사명이기 이전에
나의 숙명이라고까지 정하고 있었다. >


“혁명은 죽음이니라”
죽음을 결의하지 않으면 혁명은 할 수 없다. 우리들의 혁명은 광선유포라고 하는 혁명입니다. 감옥에 들어가더라도 사형을 선고 받아도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것을 도다 선생님에게 배웠다. 이러한 결의로 나는 오늘날까지 싸워 왔다” (1997.5.9 제5회 전국 남자부 간부회 메시지)

이케다 선생님의 사제정신은 일반적인 사제관을 초월한다. 스승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스승의 모든 구상을 다른 이가 아닌 스스로 실현하고자 목숨을 불태웠다. >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끝까지 간다. 선생님과 함께 살고, 선생님의 목적을 위해 죽겠다고 결심했다. 제자로서 선생님의 뜻을 이어 받아 광선유포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가려고 결심했다. 그때부터 선생님의 마음, 생각이 선명하게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스승의 위대함, 훌륭함을 흉중 깊이 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스승의 리듬에 맞추어 갈 수 있는가를 알게 되었다.
내가 말하는 것 행동 하고 있는 것은 모두 선생님의 마음을 이어 받은 말과 행동이다. 사제의 마음이란 끝까지 ‘불이’가 아니면 불법의 생명은 없다.
스승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제자이다. ‘사제’이다”(1991.10.16 제13회 간사이 총회) >

//도다 선생님(To 이케다 선생님께) :
“다이사쿠 너는 죽으려고 하고 있다. 나에게 목숨을 바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곤란하다. 자네는 끝까지 살아야 한다. 반드시 끝까지 살아야 한다. 내 목숨과 교환하는 것이다.” >
//이케다 선생님(To 제자에게) :
청년 여러분, 사제의 길은 이만큼 철저합니다. 말로만 하는 사람은 절대 모른다. 엄숙한 것이다. ‘마음’인 것이다. 묘법의 무한한 힘을 어디까지 끌어낼 수 있는가. 그것도 신심의 ‘마음’ 하나로 결정된다. >

이케다 선생님은 스승과의 맹세를 반드시 실현하는 인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스승께서 구상한 창가대학, 세계적인 세이쿄신문사, 전세계의 지도자들에게 도다 선생님의 사상을 전해간다는 맹세, 최고의 학회 건물을 짓겠다는 그 약속, 세계 광선유포의 그 맹세 >

이제 우리의 실천이 남아 있습니다.
나 자신의 위대한 인간혁명을 위해 나아가 한국 전 민중의 행복과 평화를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야 말로 사제불이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다 선생님의 농담까지도 실천해 오신 이케다 선생님처럼 광선유포의 단체인 창가학회를 더욱 지키고 동지를 지키고 민중을 구제하는 대법전에 제자인 우리가 나서야 할 차례입니다. >

말로만 외치는 사제인가?
아니면 사제불이인가?
스승은 엄연히 계시며 광선유포의 지휘를 잡고 계십니다. 스승을 자각하고 사제공전의 투쟁을 관철하는가 아닌가는 제자인 우리의 몫입니다. >

스승 도다 선생님은 유언처럼 외치셨습니다.

스승과 운명을 같이 하는 제자이어라!
스승과 고락을 같이 하는 제자이어라!
스승과 목적을 같이 하는 제자이어라!
스승과 승리를 같이 하는 제자이어라!
스승과 생사를 같이 하는 제자이어라!


사제불이란 관념론이 아닙니다. 또 현실과 동떨어진 고차원적인 것도 아닙니다.
각자 사회에서 가정에서 승리하는 것, 절복의 선두에 서서 광선유포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제자의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

현실에서 승리하라!! 그리고 불법의 정의를 증명하자!

남자부 동지 여러분, 추운 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혹한의 겨울이지만 더욱 분기하여 지금 있는 장소에서 더욱 절복 홍교와 자기 단련에 철저한 자신이 될 것을 함께 결의하지 않으시렵니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