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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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론] - 십계
관리자
202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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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십계(十界)
여기서는 십계론의 법리(法理)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지금의 인생에서 자신의 생명에 갖춰진 부처의 경애를 열어 나타내는 신심의 근본목적을 배웁니다.
►십계
‘십계’는 생명의 상태, 경애를 열종류로 분류한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관의 기본입니다.
십계의 법리를 배움으로써 경애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각자가 각각의 경애를 변혁하는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십계’ 각각의 이름은 지옥계(地獄界), 아귀계(餓鬼界), 축생계(畜生界), 수라계(修羅界), 인계(人界), 천계(天界), 성문계(聲聞界), 연각계(緣覺界), 보살계(菩薩界), 불계(佛界)입니다.
이중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을 모아 ‘육도(六道)’라고 하고, 성문, 연각, 보살, 불을 모아 ‘사성(四聖)’이라고 합니다. ‘육도’는 인도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세계관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본디 생명이 생사를 되풀이하는 세계를 크게 여섯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 ‘사성’은 불도수행으로 얻는 경애입니다.
법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는 십계를 각각 고정화된 생명경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그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깨고, 십계 중 불계를 제외한 지옥계부터 보살계까지 구계(九界)의 중생에게 불계가 갖춰져 있다고 밝혔습니다. 성불한 부처도 구계의 경애를 갖추고 있다고 설하여 십계는 고정적인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에 열 종류의 경애를 갖추었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지금 십계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계(界)의 모습을 나타내는 생명이라도 십계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緣)에 따라 다른 계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의 각계가 서로 십계를 갖춘 것을 십계호구(十界互具)라고 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정토라 함도 지옥이라 함도 밖에는 없느니라. 오직 우리들의 가슴속에 있느니라. 이것을 깨달음을 부처라 하고 이에 미혹함을 범부라 하며”(어서 1504쪽, 통해 : 부처의 청정한 국토라 하는 것도 지옥이라 하는 것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라 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면 범부라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십계가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은 설령 지금 자신이 지옥의 괴로운 경애에 있다 하더라도 크게 환희하는 불계의 경애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법화경에 바탕을 둔 십계론은 자신의 생명경애를 다이나믹하게 변혁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怒)하며, 어느 때는 평온하고 어느 때는 탐(貪)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諂曲)이니라. 노함은 지옥, 탐함은 아귀, 어리석음은 축생, 첨곡함은 수라, 기뻐함은 천(天), 평온함은 인(人)이니라.”(어서 241쪽)
이 어서의 글월에 입각하여 육도를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① 지옥계
지옥은 본디 ‘지하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경전에서는 팔열지옥(八熱地獄), 팔한지옥(八寒地獄) 등 수많은 지옥을 설합니다.
지옥계는 괴로움에 사로잡힌 가장 낮은 경애입니다. ‘지’는 가장 낮은 바닥을 의미하고 ‘옥’은 구속되어 묶여 있는 자유롭지 못함을 나타냅니다.“지옥은 무서우니 불길을 가지고 집으로 삼는다”(어서 1439쪽)고 하듯이 지옥계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마치 불길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세계라고 느끼는 경애를 말합니다.
또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노함은 지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뜻대로 되지 않는 자기자신이나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주변 세계에 불만을 쏟을 데가 없는 원한에 쌓인 마음입니다. 괴로움의 세계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생명의 신음소리가 분노입니다.
말하자면 ‘사는 것 자체가 괴롭다.’ ‘무엇을 봐도 불행하게 느끼는’ 경애가 지옥계입니다.
② 아귀계
아귀계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애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아귀의 본디 뜻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은 자는 언제나 굶주려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멈출 줄 모르는 심한 욕망의 불길에 몸도 마음도 타버린 생명 상태를 아귀계라고 표현합니다.
대성인은 “탐(貪)함은 아귀”, 또 “아귀는 슬프니라 기갈(飢渴)로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고”(어서 1439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려 아이마저 잡아먹을 정도의 탐욕, 즉 끝이 없는 욕망에 휘둘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해 괴로워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물론 욕망 그 자체에는 선악의 양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식욕 등의 욕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욕망이 인간을 진보, 향상시키는 에너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창조적인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괴로워하는 경애가 아귀계입니다.
③ 축생계
축생이라는 말은 본디 짐승이나 새 등의 동물을 가리킵니다. 축생계의 특징은 눈앞의 이해에 사로잡혀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대성인은 “어리석음은 축생”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인과(因果)의 도리를 모르고 정사(正邪), 선악의 판단에 눈이 어두워 당장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또 “축생의 마음은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하느니라.”(어서 957쪽), “축생은 잔해(殘害, 상처를 입혀서 죽임)라 해서 서로 살육한다.”(어서 1439쪽)고 말씀하시듯 축생계의 생명은 이성과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관철하는 경애입니다.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해,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은 자신을 파멸시켜 괴로워합니다.
〈축생이라는 표현은 고대 인도의 표현을 답습한 것입니다. 동물이라 해도 예를 들어 맹도견처럼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례도 있습니다. 또 거꾸로 인간이라 해도 전쟁처럼 다른 동물보다도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의 셋은 모두 고뇌하는 경애이므로 ‘삼악도(三惡道)’라고 합니다.
④ 수라계
수라는 본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여 다투기를 좋아하는 고대 인도의 신의 이름입니다.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늘 남을 이기려는 ‘승타(勝他)의 염(念)’이 강한 것이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뛰어나고 타인은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만심(慢心)을 일으켜서 타인을 가벼이 여깁니다. 그리고 타인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타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또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비굴해져서 아첨을 떱니다.
자신을 매우 뛰어나게 보이려고 허상을 만들기 위해 겉으로 인격자나 착한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 겸허한 체 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한 질투와 분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서로 다르고 앞뒤가 다른 것도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첨곡함은 수라”라고 설하셨습니다. ‘첨곡’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상대방에게 영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첨(諂)’은 ‘아첨하다, 비위를 맞추다’는 의미이고, ‘곡(曲)’은 ‘도리를 굽히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수라계는 탐진치의 삼독(탐욕, 분노, 우치라는 세가지 근본적인 번뇌)에 휘둘리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와 달리, 자신의 의사로 행동을 결정짓는 만큼 삼악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불행한 경애이므로 삼악도에 수라계를 더해 ‘사악취(四惡趣)’라고도 합니다.
⑤ 인계
인계는 평온하고 평정한 생명 상태로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대성인은 “평온함은 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계의 특질은 인과의 도리를 알고, 사물의 선악을 판단하는 이성의 힘이 명확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현명함을 사람이라고 하며, 어리석음을 축(畜)이라 하느니라.”(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판별하는 힘이 있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경애입니다. 이 인간다운 경애도 결코 노력 없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악연 많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향상하려는 자기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인계는 ‘자기를 이긴’ 경애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인계의 생명은 ‘성도정기(聖道正器)’라 하여 불도(=성도)를 이룰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인계에는 악연을 만나 악도로 떨어지는 위험성도 있는 반면, 수행에 면려함으로써 불법의 깨달음의 경애인 사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⑥ 천계
천계의 천은 본디 고대 인도에서 지상의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신들을 말하며, 또 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금세에 선행을 베푼 사람은 내세에 천에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법에서는 천계를 생명경애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노력한 결과, 욕망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기쁨의 경애입니다. 대성인은 “기뻐함은 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이라 해도 수면욕과 식욕 등의 본능적인 욕망, 새로운 자동차나 집을 사고 싶다는 물질적인 욕망,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를 얻고 싶다는 사회적인 욕망, 미지의 세계를 알거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싶다는 정신적인 욕망 등이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이 충족되어 기쁨에 젖어 있는 경지가 천계입니다.그러나 천계의 기쁨은 영속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천계는 목표로 삼을 참된 행복경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육도에서 사성으로 앞서 말한 지옥계부터 천계까지의 육도는 결국 자신의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것들입니다. 욕망이 채워졌을 때는 천계의 기쁨을 맛보고, 환경이 평온한 경우는 인계의 평안함을 맛볼 수 있지만, 그러한 조건이 사라진 경우에는 바로 지옥계와 아귀계의 괴로워하는 경애로 전락하고 맙니다.
환경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육도의 경애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경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육도의 경애를 뛰어넘어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주체적인 행복 경애를 구축하려는 것이 불도수행입니다. 그리고 불도수행으로 얻는 깨달음의 경애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라는 사성의 경애입니다.
⑦ 성문계 ⑧ 연각계
성문계와 연각계의 둘은 불교 중에서도 소승교(小乘敎)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경애라 하여, 성문계, 연각계를 모아 ‘이승(二乘)’이라고 부릅니다.
성문계는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부분적인 깨달음을 획득한 경애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연각계는 여러가지 사물을 연으로 삼아 혼자 힘으로 불법의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은 경애입니다. 독각(獨覺)이라고도 합니다.
이승의 부분적인 깨달음은 ‘무상(無常)’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상이란 만물이 시간과 함께 변화, 생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과 세계를 객관시하고 세간 즉 현실세계에 있는 것은 모두 연에 따라 생겨남과 동시에 변화 소멸한다는 진리를 자각하고 무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이승의 경애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자신을 포함해 만물이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세간(世間)의 무상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인계에 이승계(二乘界)가 없으리요”(어서 241쪽)라고 하시며 인계에 이승계가 갖춰져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승의 경애를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무상에 집착하는 번뇌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여 그 번뇌를 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기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소멸시킨다는 잘못된 길(회신멸지〈灰身滅智〉)에 들어서고 맙니다.
이승이 얻은 깨달음은 부처의 깨달음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승은 그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고 부처의 참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승인 부처의 경애가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낮은 깨달음에서 멈추고 맙니다.
또 이승은 자신의 깨달음에만 집착하여 타인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에고이즘에 빠져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의 마음에 이승의 한계가 있습니다.
⑨ 보살계
보살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이승이 부처를 스승으로 삼고 있어도, 자신들은 부처의 경애에 도저히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데 비해, 보살은 스승인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합니다. 즉 보살이 도달한 경애의 특징은 불계라는 최고의 경애를 구하는 ‘구도(求道)’와 함께 자신이 불도수행의 도중에서 얻은 공덕을 타인에게도 나누어 주려는 ‘이타(利他)’의 실천이 있습니다.
현실 세간 속에서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에 동고(同苦)하고, 발고여락(拔苦與樂,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줌)의 실천을 통해 자타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이승이 ‘자기중심’의 마음에 사로잡혀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는 데 비해, 보살계는 ‘남을 위해’, ‘법을 위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이 보살계의 경애는 ‘자비’가 근본입니다.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무고(無顧)의 악인도 역시 처자(妻子)를 자애하니 보살계의 일분(一分)이니라.”(어서 241쪽)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악인이라도 자기 처자식을 자애하듯이 생명에는 본디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듯 보살계는 자비의 마음을 만인에게 베푸는 삶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⑩ 불계
불계는 부처가 체현한 존극(尊極)의 경애입니다.
부처(불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주와 생명을 꿰뚫은 근원법인 묘법에 눈을 뜬 사람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인도에서 태어난 석존(釋尊, 석가불) 등을 말합니다. 또 여러 경전에 아미타불 등 갖가지 부처가 나오는데 이는 부처의 경애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가공의 부처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하려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에 불계라는 존극의 경애를 나타내고 일체중생의 성불의 길을 확립하신 말법의 어본불이십니다.
불계란 자기 생명의 근원이 묘법이라고 각지(覺知)함으로써 열리는 광대하고 복덕이 풍부한 경애입니다. 이 경애를 연 부처는 무상(無上)의 자비와 지혜를 체현하여 그 힘으로 일체중생에게 자신과 똑같은 불계의 경애를 얻도록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합니다.
불계는 우리 생명에 본디 갖춰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괴로움이 많은 현실생활 속에서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성인은 사람들이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한 방도로써 어본존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본존에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깨달은 불계의 생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진수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우리는 어본존을 믿고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창제에 힘쓸 때 자신의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불계의 생명과 신심과의 깊은 관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말대(末代)의 범부가 출생하여 법화경을 믿음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하기 때문이니라.”(어서 24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은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는 가르침인데 그 법화경을 믿을 수 있는 것은인간으로써 자신의 생명속에 본디 불계가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같이 대성인의 말씀을 이어받아 니치칸(日寬) 상인은 “법화경을 믿는 마음이 강함을 이름하여 불계라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화경은 말법의 법화경인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말하는 것으로 어본존을 믿고 꿋꿋이 살아가는 ‘강성한 신심’ 그 자체가 다름아닌 불계입니다.
이 불계의 경애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그 어떤 것에도 침해당하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입니다.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은 신심으로 얻은 이 경애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경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불계의 경애는 종종 사자왕(師子王)에 비유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자왕처럼 두려움이 없는 안온한 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십계론의 법리(法理)를 통해서 우리 자신이 지금의 인생에서 자신의 생명에 갖춰진 부처의 경애를 열어 나타내는 신심의 근본목적을 배웁니다.
►십계
‘십계’는 생명의 상태, 경애를 열종류로 분류한 불법에서 설하는 생명관의 기본입니다.
십계의 법리를 배움으로써 경애를 올바르게 파악하여 각자가 각각의 경애를 변혁하는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십계’ 각각의 이름은 지옥계(地獄界), 아귀계(餓鬼界), 축생계(畜生界), 수라계(修羅界), 인계(人界), 천계(天界), 성문계(聲聞界), 연각계(緣覺界), 보살계(菩薩界), 불계(佛界)입니다.
이중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을 모아 ‘육도(六道)’라고 하고, 성문, 연각, 보살, 불을 모아 ‘사성(四聖)’이라고 합니다. ‘육도’는 인도에서 예로부터 내려오는 세계관을 불교가 받아들인 것으로 본디 생명이 생사를 되풀이하는 세계를 크게 여섯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 ‘사성’은 불도수행으로 얻는 경애입니다.
법화경 이외의 경전에서는 십계를 각각 고정화된 생명경애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법화경에서는 그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깨고, 십계 중 불계를 제외한 지옥계부터 보살계까지 구계(九界)의 중생에게 불계가 갖춰져 있다고 밝혔습니다. 성불한 부처도 구계의 경애를 갖추고 있다고 설하여 십계는 고정적인 별개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에 열 종류의 경애를 갖추었다고 밝혔습니다.
따라서 지금 십계 가운데 어느 하나의 계(界)의 모습을 나타내는 생명이라도 십계를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에, 연(緣)에 따라 다른 계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십계의 각계가 서로 십계를 갖춘 것을 십계호구(十界互具)라고 합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정토라 함도 지옥이라 함도 밖에는 없느니라. 오직 우리들의 가슴속에 있느니라. 이것을 깨달음을 부처라 하고 이에 미혹함을 범부라 하며”(어서 1504쪽, 통해 : 부처의 청정한 국토라 하는 것도 지옥이라 하는 것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가슴속에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부처라 하고, 이를 깨닫지 못하면 범부라고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에 십계가 모두 갖춰져 있다는 것은 설령 지금 자신이 지옥의 괴로운 경애에 있다 하더라도 크게 환희하는 불계의 경애로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법화경에 바탕을 둔 십계론은 자신의 생명경애를 다이나믹하게 변혁할 수 있는 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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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십계 각각의 경애를 알아봅시다. 먼저 우리 생명에 갖춰진 육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怒)하며, 어느 때는 평온하고 어느 때는 탐(貪)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諂曲)이니라. 노함은 지옥, 탐함은 아귀, 어리석음은 축생, 첨곡함은 수라, 기뻐함은 천(天), 평온함은 인(人)이니라.”(어서 241쪽)
이 어서의 글월에 입각하여 육도를 하나하나 알아보겠습니다.
① 지옥계
지옥은 본디 ‘지하의 감옥’이라는 뜻으로 경전에서는 팔열지옥(八熱地獄), 팔한지옥(八寒地獄) 등 수많은 지옥을 설합니다.
지옥계는 괴로움에 사로잡힌 가장 낮은 경애입니다. ‘지’는 가장 낮은 바닥을 의미하고 ‘옥’은 구속되어 묶여 있는 자유롭지 못함을 나타냅니다.“지옥은 무서우니 불길을 가지고 집으로 삼는다”(어서 1439쪽)고 하듯이 지옥계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 전체를 마치 불길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세계라고 느끼는 경애를 말합니다.
또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노함은 지옥”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는 뜻대로 되지 않는 자기자신이나 괴로움을 느끼게 하는 주변 세계에 불만을 쏟을 데가 없는 원한에 쌓인 마음입니다. 괴로움의 세계에 사로잡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생명의 신음소리가 분노입니다.
말하자면 ‘사는 것 자체가 괴롭다.’ ‘무엇을 봐도 불행하게 느끼는’ 경애가 지옥계입니다.
② 아귀계
아귀계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는 경애입니다.
고대 인도에서 아귀의 본디 뜻은 ‘죽은 자’를 말합니다. 죽은 자는 언제나 굶주려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멈출 줄 모르는 심한 욕망의 불길에 몸도 마음도 타버린 생명 상태를 아귀계라고 표현합니다.
대성인은 “탐(貪)함은 아귀”, 또 “아귀는 슬프니라 기갈(飢渴)로 굶주려 아이를 잡아먹고”(어서 1439쪽)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굶주려 아이마저 잡아먹을 정도의 탐욕, 즉 끝이 없는 욕망에 휘둘려 마음이 자유롭지 못해 괴로워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물론 욕망 그 자체에는 선악의 양면이 있습니다. 인간은 식욕 등의 욕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또 욕망이 인간을 진보, 향상시키는 에너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창조적인 방향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괴로워하는 경애가 아귀계입니다.
③ 축생계
축생이라는 말은 본디 짐승이나 새 등의 동물을 가리킵니다. 축생계의 특징은 눈앞의 이해에 사로잡혀 이성이 작용하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대성인은 “어리석음은 축생”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인과(因果)의 도리를 모르고 정사(正邪), 선악의 판단에 눈이 어두워 당장의 이해에 따라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또 “축생의 마음은 약함을 위협하고 강함을 두려워하느니라.”(어서 957쪽), “축생은 잔해(殘害, 상처를 입혀서 죽임)라 해서 서로 살육한다.”(어서 1439쪽)고 말씀하시듯 축생계의 생명은 이성과 양심을 저버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을 해치는 약육강식의 생존경쟁을 관철하는 경애입니다. 눈앞의 일밖에 보지 못해, 미래를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결국은 자신을 파멸시켜 괴로워합니다.
〈축생이라는 표현은 고대 인도의 표현을 답습한 것입니다. 동물이라 해도 예를 들어 맹도견처럼 사람을 돕는 것을 사명으로 하여 살아가는 사례도 있습니다. 또 거꾸로 인간이라 해도 전쟁처럼 다른 동물보다도 잔혹한 행위를 일삼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의 셋은 모두 고뇌하는 경애이므로 ‘삼악도(三惡道)’라고 합니다.
④ 수라계
수라는 본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여 다투기를 좋아하는 고대 인도의 신의 이름입니다.
자기와 남을 비교하여 늘 남을 이기려는 ‘승타(勝他)의 염(念)’이 강한 것이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타인과 비교하여 자신이 뛰어나고 타인은 뒤쳐졌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만심(慢心)을 일으켜서 타인을 가벼이 여깁니다. 그리고 타인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타인을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또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비굴해져서 아첨을 떱니다.
자신을 매우 뛰어나게 보이려고 허상을 만들기 위해 겉으로 인격자나 착한 사람인 것처럼 꾸미고, 겸허한 체 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자신보다 뛰어난 자에 대한 질투와 분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서로 다르고 앞뒤가 다른 것도 수라계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첨곡함은 수라”라고 설하셨습니다. ‘첨곡’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고 상대방에게 영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첨(諂)’은 ‘아첨하다, 비위를 맞추다’는 의미이고, ‘곡(曲)’은 ‘도리를 굽히고 따른다’는 뜻입니다
수라계는 탐진치의 삼독(탐욕, 분노, 우치라는 세가지 근본적인 번뇌)에 휘둘리는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와 달리, 자신의 의사로 행동을 결정짓는 만큼 삼악도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은 괴로움을 수반하는 불행한 경애이므로 삼악도에 수라계를 더해 ‘사악취(四惡趣)’라고도 합니다.
⑤ 인계
인계는 평온하고 평정한 생명 상태로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경애를 말합니다. 대성인은 “평온함은 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계의 특질은 인과의 도리를 알고, 사물의 선악을 판단하는 이성의 힘이 명확히 작용하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현명함을 사람이라고 하며, 어리석음을 축(畜)이라 하느니라.”(어서 1174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을 판별하는 힘이 있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경애입니다. 이 인간다운 경애도 결코 노력 없이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악연 많은 세상에서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향상하려는 자기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말하자면 인계는 ‘자기를 이긴’ 경애의 첫걸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인계의 생명은 ‘성도정기(聖道正器)’라 하여 불도(=성도)를 이룰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합니다.
인계에는 악연을 만나 악도로 떨어지는 위험성도 있는 반면, 수행에 면려함으로써 불법의 깨달음의 경애인 사성으로 가는 길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⑥ 천계
천계의 천은 본디 고대 인도에서 지상의 인간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신들을 말하며, 또 신들이 사는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고대 인도에서는 금세에 선행을 베푼 사람은 내세에 천에 태어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불법에서는 천계를 생명경애의 하나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노력한 결과, 욕망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기쁨의 경애입니다. 대성인은 “기뻐함은 천”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욕망이라 해도 수면욕과 식욕 등의 본능적인 욕망, 새로운 자동차나 집을 사고 싶다는 물질적인 욕망, 사회에서 지위와 명예를 얻고 싶다는 사회적인 욕망, 미지의 세계를 알거나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고 싶다는 정신적인 욕망 등이 있습니다.
그러한 욕망이 충족되어 기쁨에 젖어 있는 경지가 천계입니다.그러나 천계의 기쁨은 영속적인 것은 아닙니다.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점차 희미해지고 결국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천계는 목표로 삼을 참된 행복경애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육도에서 사성으로 앞서 말한 지옥계부터 천계까지의 육도는 결국 자신의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것들입니다. 욕망이 채워졌을 때는 천계의 기쁨을 맛보고, 환경이 평온한 경우는 인계의 평안함을 맛볼 수 있지만, 그러한 조건이 사라진 경우에는 바로 지옥계와 아귀계의 괴로워하는 경애로 전락하고 맙니다.
환경에 좌우된다는 의미에서 육도의 경애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주체적인 경애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육도의 경애를 뛰어넘어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주체적인 행복 경애를 구축하려는 것이 불도수행입니다. 그리고 불도수행으로 얻는 깨달음의 경애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라는 사성의 경애입니다.
⑦ 성문계 ⑧ 연각계
성문계와 연각계의 둘은 불교 중에서도 소승교(小乘敎)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경애라 하여, 성문계, 연각계를 모아 ‘이승(二乘)’이라고 부릅니다.
성문계는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부분적인 깨달음을 획득한 경애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연각계는 여러가지 사물을 연으로 삼아 혼자 힘으로 불법의 부분적인 깨달음을 얻은 경애입니다. 독각(獨覺)이라고도 합니다.
이승의 부분적인 깨달음은 ‘무상(無常)’을 깨닫는 것입니다. 무상이란 만물이 시간과 함께 변화, 생멸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과 세계를 객관시하고 세간 즉 현실세계에 있는 것은 모두 연에 따라 생겨남과 동시에 변화 소멸한다는 진리를 자각하고 무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극복하는 것이 이승의 경애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자신을 포함해 만물이 무상한 존재라는 것을 강하게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세간(世間)의 무상은 눈앞에 있으니 어찌 인계에 이승계(二乘界)가 없으리요”(어서 241쪽)라고 하시며 인계에 이승계가 갖춰져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승의 경애를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무상에 집착하는 번뇌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여 그 번뇌를 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려면 자기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소멸시킨다는 잘못된 길(회신멸지〈灰身滅智〉)에 들어서고 맙니다.
이승이 얻은 깨달음은 부처의 깨달음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것이지 완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승은 그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고 부처의 참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스승인 부처의 경애가 위대하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자기들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낮은 깨달음에서 멈추고 맙니다.
또 이승은 자신의 깨달음에만 집착하여 타인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 에고이즘에 빠져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의 마음에 이승의 한계가 있습니다.
⑨ 보살계
보살은 부처의 깨달음을 얻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중생이라는 뜻입니다. 이승이 부처를 스승으로 삼고 있어도, 자신들은 부처의 경애에 도저히 이르지 못한다고 하는 데 비해, 보살은 스승인 부처의 경애에 도달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또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려고 합니다. 즉 보살이 도달한 경애의 특징은 불계라는 최고의 경애를 구하는 ‘구도(求道)’와 함께 자신이 불도수행의 도중에서 얻은 공덕을 타인에게도 나누어 주려는 ‘이타(利他)’의 실천이 있습니다.
현실 세간 속에서 사람들의 괴로움과 슬픔에 동고(同苦)하고, 발고여락(拔苦與樂,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줌)의 실천을 통해 자타 함께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보살의 마음입니다.
이승이 ‘자기중심’의 마음에 사로잡혀 낮은 깨달음에 안주하는 데 비해, 보살계는 ‘남을 위해’, ‘법을 위해’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경애입니다. 이 보살계의 경애는 ‘자비’가 근본입니다.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무고(無顧)의 악인도 역시 처자(妻子)를 자애하니 보살계의 일분(一分)이니라.”(어서 241쪽)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타인을 돌아보지 않는 악인이라도 자기 처자식을 자애하듯이 생명에는 본디 타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듯 보살계는 자비의 마음을 만인에게 베푸는 삶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⑩ 불계
불계는 부처가 체현한 존극(尊極)의 경애입니다.
부처(불타)는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우주와 생명을 꿰뚫은 근원법인 묘법에 눈을 뜬 사람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인도에서 태어난 석존(釋尊, 석가불) 등을 말합니다. 또 여러 경전에 아미타불 등 갖가지 부처가 나오는데 이는 부처의 경애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가공의 부처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하려고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생명에 불계라는 존극의 경애를 나타내고 일체중생의 성불의 길을 확립하신 말법의 어본불이십니다.
불계란 자기 생명의 근원이 묘법이라고 각지(覺知)함으로써 열리는 광대하고 복덕이 풍부한 경애입니다. 이 경애를 연 부처는 무상(無上)의 자비와 지혜를 체현하여 그 힘으로 일체중생에게 자신과 똑같은 불계의 경애를 얻도록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합니다.
불계는 우리 생명에 본디 갖춰져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괴로움이 많은 현실생활 속에서 나타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대성인은 사람들이 불계의 생명을 나타내기 위한 방도로써 어본존을 나타내셨습니다.
어본존에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 대성인이 깨달은 불계의 생명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 진수가 남묘호렌게쿄입니다.
우리는 어본존을 믿고 자행화타(自行化他)에 걸친 창제에 힘쓸 때 자신의 생명에 내재되어 있는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불계의 생명과 신심과의 깊은 관계에 대해 대성인은 〈관심본존초〉에서 “말대(末代)의 범부가 출생하여 법화경을 믿음은 인계에 불계를 구족하기 때문이니라.”(어서 241쪽)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법화경은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는 가르침인데 그 법화경을 믿을 수 있는 것은인간으로써 자신의 생명속에 본디 불계가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와같이 대성인의 말씀을 이어받아 니치칸(日寬) 상인은 “법화경을 믿는 마음이 강함을 이름하여 불계라 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화경은 말법의 법화경인 남묘호렌게쿄의 어본존을 말하는 것으로 어본존을 믿고 꿋꿋이 살아가는 ‘강성한 신심’ 그 자체가 다름아닌 불계입니다.
이 불계의 경애를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그 어떤 것에도 침해당하지 않는 ‘절대적인 행복경애’입니다.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은 신심으로 얻은 이 경애를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는 경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불계의 경애는 종종 사자왕(師子王)에 비유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자왕처럼 두려움이 없는 안온한 경애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