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서비스 한국SGI는 불법(佛法)의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고 평화·문화·교육운동과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습니다.

교학 Q&A

 

  • 법련 1월호 대성인의 생애 44족~

  • 관리자

  • 2007.02.06

  • 1,159

안녕하십니까?
한국SGI 교학부입니다.

질문하신 내용에 관하여 법련 1월호 대성인의 생애 편에 수호국가론 집필의 배경과 대의에 대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골자는 염불종을 엄하게 파절하시는 내용입니다. 일부 인용해 드리오니 참고 바랍니다.

***************************

가마쿠라 홍교 개시

입종선언 후, 대성인은 당시 수도인 가마쿠라에 들어가 1253년 여름 가마쿠라 동남쪽에 있는 나고에의 마쓰바가야쓰에 초암을 지었습니다.

마쓰바가야쓰는 그 후 1271년 다쓰노구치 법난에 이르기까지 18년 동안(이즈 유죄 3년 포함) 대성인이 홍교를 펼치신 중심지였고, 제자・신도들이 절차탁마하는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는 정토종과 선종이 널리 지지를 받아 가마쿠라 불교계에서는 선종의 겐초사와 진언율종의 고쿠라쿠사라는 두 개의 큰 절을 짓는 중이었습니다.

최초의 제자는 닛쇼

대성인이 가마쿠라에서 홍교할 때 최초로 제자가 된 사람이 닛쇼(日昭)입니다.

1253년 11월, 히에이산의 학승 조벤(成弁)이 교토에서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에 있던 대성인을 찾아가 최초의 제자가 되어 닛쇼라는 법호(法號)를 받았습니다.

대성인은 닛쇼를 ‘벤전(弁殿)’혹은‘벤아자리(弁阿門梨)’라고 부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254년 10월에는 닛쇼의 조카인 니치로(日朗)가 입문했습니다.

이 밖에 당시 입문한 문하로, 〈제종문답초〉를 받은 산미보 니치교와 다이신 아자리, 무사시공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깅고, 이케가미 형제 등도 잇달아 입신

재가 신도 중에는 1253년에 도키조닌(富木常忍)이 입신했습니다.

조닌은 시모우사 지방 가쓰시카 군 하치반소 와카미야의 영주이자 지바 씨를 섬기는 무사였다고 합니다.

그 뒤 시조깅고(四條金吾)가 입신합니다. 처음에는 겐초사의 도류 밑에서 참선을 수행했으나,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에 계신 대성인을 방문한 후 선종을 버리고 대성인에게 귀의했습니다.

또 1256년 무렵에는 신시젠슨(進士善春), 구도 요시타카(工藤吉隆), 이케가미 무네나카(池上宗仲), 에바라 요시무네(荏原義宗) 등이 입신합니다.

1255년 5편의 어서 술작

1255년 대성인이 가마쿠라에서 술작하신 어서는 5편 정도 있는데 이 중, 〈제종문답초(諸宗問答抄)〉, 〈연성초(蓮盛抄)〉, 〈주사친(主師親)어서〉, 〈염불무간지옥초〉 4편은 선종과 염불종을 중점적으로 파절했는데, 이는 두 종파가 당시 불교계의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이라고 보입니다.

특히 “염불은 무간지옥의 업(業)이니라”고 철저하게 논파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일체불행의 근원인 사종사의를 버리고 묘법에 귀의하는 이외에 일체중생의 성불도, 일국의 안태(安泰)도 없다는 어본불의 열렬한 민중구제의 외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같은 해 쓰신 〈일생성불초〉는 시모우사의 도키조닌에게 주신 어서입니다.

당시 염불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져 현실 생활과 사회 개혁보다, 죽은 후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한다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어서 대성인은 이 어서를 통해서 민중에게 각성할 것을 주장하셨습니다.

대성인은 이전경으로 절대로 성불할 수 없다는 것, 기심(己心) 밖에서 이상(理想)경지를 구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 생명속에 불성(佛性)이 있으며 그것을 깨닫는 것이 석존이 설한 법화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일생성불’이라는 말로 가르치셨습니다.

초심자인 문하생에게 주는 어서

1258년부터 1260년에 걸쳐 쓰신 어서들은 〈일대성교 대의〉, 〈일념삼천 이사〉, 〈십여시사〉, 〈일념삼천 법문〉, 〈십법계사〉, 〈십법계 명인과초〉 등으로, 특히 권실(權實)이 혼란한 당시의 불교계의 잘못을 지적하고, 석존 불법의 구극은 법화경에 있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법화경이 다른 경(經)보다 뛰어난 이유는 일념삼천(一念三千)과 일심삼관(一心三觀)의 법문을 설했기 때문입니다. 또 천태대사가 깨달은 일념삼천의 법문도 법화경의 십여시(十如是)에서 기인했으며, 일념삼천・일심삼관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5자에 갖춰져 있습니다.

이 어서들은 문하생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자들에게 제경(諸經)과 제종(諸宗)의 승렬(勝劣)・정사(正邪)를 명확하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고 짐작됩니다.

염불종을 파절

이렇게 대성인이 가마쿠라・마쓰바가야쓰를 중심으로 한창 홍교 중일 때는 전대(前代)에 없던 비참한 재해가 이어져 민심은 흉흉했으며 민중의 고뇌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에서 이러한 국토의 양상을 예리하게 응시하신 대성인은 계속되는 재난의 근본 원인과 민중을 구제할 수 있는 방도를 찾기 위해, 1258년 2월에 스루가 지방 이와모토의 짓소사(實相寺)에 들어가 일체경을 열독하십니다.

이때 짓소사 가까운 곳에 있던 천태종 사십구원(四十九院)에서 수학 중이던 13세의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존엄한 모습을 접하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대성인은 일체경을 열독하는 한편, 1258년에 〈일대성교 대의〉를 저술하여 부처의 정의(正意)를 밝히시고, 법화경을 난행도(難行道)・잡행(雜行)이라고 배척하는 호넨의 사의(邪義)를 파절하십니다.

이듬해인 1259년에는 〈수호국가론〉을 저술하여 불법을 파괴하고 혼란을 가져온 최대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호넨의 《선택집》을 엄하게 파절하십니다.

《선택집》은 일본 정토종 입종(立宗)의 책인데 여기서 호넨은 정토삼부경을 제외한 경문으로 말대의 중생은 성불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극락왕생의 가르침인 정토문 이외의 다른 가르침은 버려라(사<捨>), 닫아라(폐<閉>), 젖혀 놓아라(각<閣>), 내던져라(포<抛>)는 사의(邪義)를 주장했습니다.

대성인은 호넨의 주장이 사의인 이유는 단지 이전권교(爾前權敎)의 정토삼부경을 근본으로 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체의 성교(聖敎)를 “사폐각포하라”고 논하며 법화경을 비방하고 불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려는 데 있음을 주장하셨습니다.

제종의 학자도 《선택집》을 되풀이하여 파절했으나, 호넨의 정토종이 방법(謗法)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염불이 유포하는 것을 도와주는 결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한탄한 대성인은 〈수호국가론〉에서 호넨의 방법을 밝히고 이듬해인 1260년에는 〈재난대치초〉, 나아가 1260년 5월에는 〈창법화제목초〉를 저술하시어 거듭 호넨의 《선택집》과 염불의 사의를 파절하고, 민중의 행복과 국토의 안온을 위한다면 염불을 금하고 법화경을 근본으로 하는 이외에는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창법화제목초〉 끝 부분에는 “가마쿠라 나고에에서 씀”(어서 16쪽)이라고 있는데, 짓소사에서 가마쿠라로 돌아온 대성인의 흉중에는 2개월 후에 호조 도키요리에게 제출할 〈입정안국론〉의 구상이 이미 끝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입정안국론〉의 제출

석존 불법이 공력(功力)을 잃어버린 말법은 1052년부터 시작되는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때부터 기근・역병・홍수・지진 등의 재해가 잇따라 사람들은 고뇌와 비탄에 빠져 미래의 희망을 잃고 불행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시대가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대성인은 일체경을 열람하고, 부처의 금언에 따라 삼재칠난이 일어나는 원인은 “세상은 모두 정(正)을 배반하고 사람은 모두 악(惡)에 귀하였도다”(어서 17쪽)라고 단언하셨습니다.

즉 민중이 법화경을 배반하고 사법에 귀의하기 때문이며, 이것을 해결하려면 묘법에 귀의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호소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입정안국론〉의 상정(上程)입니다.

1260년 5월 28일, 나고에에서 〈창법화제목초〉를 다 쓰신 대성인은 그 뒤 호조 도키요리와 만나 선종은 “천마(天魔)의 소위(所爲)”(어서 1272쪽)라는 것을 파절하셨지만, 도키요리는 대성인의 말씀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리하여 1260년 7월 16일 오전 8시경, 대성인은 호조가(北條家)의 가신(家臣), 야도야 사에몬입도를 통해 제1회 국주간효의 서(書)인 〈입정안국론〉을 도키요리에게 제출했습니다.

호조 도키요리는 이보다 4년 전인 1256년 2월에 제5대 집권의 자리에서 물러나 사이묘사(最明寺)로 출가하여 사이묘사 입도라고 불리고 있었습니다. 제6대 집권에는 호조 나가도키가 취임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호넨과 도키요리가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정안국론〉 속에서는 국토의 혼란은 일체의 사법사의(邪法邪義)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셨는데, 특히 어떤 이유로 염불종을 국토의 혼란을 초래하는 ‘일흉’이라고 단호하게 파절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염불종이 불법을 파괴하는 사설(邪說)을 주장했고, 많은 민중이 극락정토의 왕생(往生)을 설한 교의를 맹목적으로 믿어 버린 나머지 현실에 직면한 갖가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힘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선(禪)・진언(眞言) 등도 간과할 수 없는 사의였기에 이미 파절하셨지만, 사회의 혼란과 민중의 비탄이라는 현실 앞에서 민중의 미혹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파절해야 할 것은 염세사상(厭世思想)과 현실도피, 체관(諦觀: 체념하여 관망함)하는 염불의 애음(哀音: 슬프고 가엾은 소리)의 영향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대성인이 강하게 염불을 파절하셨지만 오히려 큰 반발을 사 염불종은 대성인에게 습격을 가해 왔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