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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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쉬운 교학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관리자
2007.01.10
691
안녕하십니까? 한국SGI 교학부입니다.
대승교와 소승교를 비교하는 것이 오증상대 중에 두번째인 대소상대입니다. 아래의 설명은 대소상대를 질의응답 식으로 진행하는 내용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알기 쉬운 교학' (상권) 94~100쪽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목요연한 정리보다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신심 수행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대소상대 =
자타(自他)함께하는 행복 - 자신도 친구도 함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불법.
Q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부처의 생명’이 있어 어본존에 대한 창제로 그 생명을 끌어낼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가요?
A 아니요, 앞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부처는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부처란 우주와 생명을 꿰뚫은 근원의 진리를 체득한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극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창시자가 석존입니다.
그런데 석종이 입멸한 후의 불교는 부처를 너무나 숭상한 나머지 석존을 인간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해 왔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되어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출가자들은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수행의 도량에 틀어박혀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부처의 ‘소리’를 듣고 깨달음의 경애를 열어가려는 ‘성문’ 독자적인 힘으로 깨달아가는 ‘연각’을 목표로 하여 출가자들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계율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Q 그렇게 되면 현실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A 그것이 문제입니다. 출가자들은 자신이 깨닫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고 재가의 사람들은 출가자를 떠받드는 존재라고 강조되어 불교가 절 안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강하게 되어버렸습니다.
Q 그것은 ‘만인의 구제’라는 석존의 정신과는 정반대이군요.
A 그러던 중에 ‘석존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불교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만인을 평등에게 성불시키는 부처의 가르침을 민중의 손에 되찾게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대승불교의 실천자들은 과감하게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처의 경애를 열려고 수행하며 사람들까지도 성불시키는 ‘보살’의 삶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대승(大乘)의 ‘승’이란 ‘탄다’ ‘태운다’ 라는의미로 부처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을 ‘탈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래의 성문, 연각의 가르침을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소승(小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대승교와 소승교를 비교해서 대승교가 뛰어나다는 것을 밝힌 것이 ‘대소상대’입니다. ‘오중의 상대’의 두 번째의 기준입니다.
Q 탈 것의 비유는 알기쉽군요.
A 니치렌 대성인은 ‘배’에도 비유하시어 ‘소승경이라고 하는 경은 세간의 소선(小船)과 같아 불과 사람을 이(二)인, 삼(三)인 등은 태울 수 있지만 백천인은 태울 수 없다…… 대승이라고 함은 대선(大船)이니라, (어서1218쪽)고 말씀하십니다.
니치렌 불법이야말로 구극의 대승이며 전 인류를 태우는 ‘대선’입니다.
Q 대승과 소승은 수행의 내용도 전혀 다른가요.
A 괴로움이나 미혹의 원인은 ‘번뇌’(=탐,진,치의 생명) 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그 번뇌를 극복하는 것에 불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소승교는 번뇌를 단절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교의(敎義)입니다.
Q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모든 번뇌를 없엔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A 거기에 대해 대승교는 소승교와 같이 번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컨트롤하는 것을 설하였습니다. 청정하고 강력한 생명주체(불계)를 확립함으로써 번뇌를 ‘보리’라고 하는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을 ‘번뇌즉보리’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실천으로 말하면 번뇌에 정면으로 맞닥뜨려 묘법의 신심으로 번뇌를 자신의 성장의 인(因)으로 바꾸어 위대한 지혜를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소승교는 분명히 번뇌가 인간의 고뇌의 원인이라고 주목한 점에서는 자신의 변혁에 대한 제일보였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소멸시키는 수행에 전념하고, 그러기 위해서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결과로 된 것은 큰 잘못입니다.
Q 소승교는 - 자신만의 행복, 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군요. 지금의 우리나라의 사회전체도 ‘나만이 좋으면, 이라는 풍조가 확산되어 남에게 대한 배려가 잃어져가는 추세입니다.
A 현실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본래의 불교정신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타인도 함께 행복해지자는 진정한 대승보살의 실천을 관철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 학회원입니다.
‘만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 그 삶의 방식을 넓혀나가는 것이 ‘나만이 좋으면’ 이라는 이기주의 풍조를 타파하고 사회에 희망을 주는 행동이 됩니다.
대승교와 소승교를 비교하는 것이 오증상대 중에 두번째인 대소상대입니다. 아래의 설명은 대소상대를 질의응답 식으로 진행하는 내용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알기 쉬운 교학' (상권) 94~100쪽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일목요연한 정리보다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신심 수행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대소상대 =
자타(自他)함께하는 행복 - 자신도 친구도 함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불법.
Q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부처의 생명’이 있어 어본존에 대한 창제로 그 생명을 끌어낼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부처’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존재가 아닌가요?
A 아니요, 앞에서도 확인한 바와 같이 부처는 우리들과 똑같은 인간입니다. 부처란 우주와 생명을 꿰뚫은 근원의 진리를 체득한 인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극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불교의 창시자가 석존입니다.
그런데 석종이 입멸한 후의 불교는 부처를 너무나 숭상한 나머지 석존을 인간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해 왔습니다.
그리고 부처가 되어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을 출가자들은 체념하고 말았습니다.
수행의 도량에 틀어박혀 민중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부처의 ‘소리’를 듣고 깨달음의 경애를 열어가려는 ‘성문’ 독자적인 힘으로 깨달아가는 ‘연각’을 목표로 하여 출가자들은 복잡하고 번거로운 계율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Q 그렇게 되면 현실사회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A 그것이 문제입니다. 출가자들은 자신이 깨닫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고 재가의 사람들은 출가자를 떠받드는 존재라고 강조되어 불교가 절 안에 틀어박히는 경향이 강하게 되어버렸습니다.
Q 그것은 ‘만인의 구제’라는 석존의 정신과는 정반대이군요.
A 그러던 중에 ‘석존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불교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만인을 평등에게 성불시키는 부처의 가르침을 민중의 손에 되찾게 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대승불교의 실천자들은 과감하게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그리고 자신이 부처의 경애를 열려고 수행하며 사람들까지도 성불시키는 ‘보살’의 삶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대승(大乘)의 ‘승’이란 ‘탄다’ ‘태운다’ 라는의미로 부처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을 ‘탈 것’에 비유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종래의 성문, 연각의 가르침을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소승(小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대승교와 소승교를 비교해서 대승교가 뛰어나다는 것을 밝힌 것이 ‘대소상대’입니다. ‘오중의 상대’의 두 번째의 기준입니다.
Q 탈 것의 비유는 알기쉽군요.
A 니치렌 대성인은 ‘배’에도 비유하시어 ‘소승경이라고 하는 경은 세간의 소선(小船)과 같아 불과 사람을 이(二)인, 삼(三)인 등은 태울 수 있지만 백천인은 태울 수 없다…… 대승이라고 함은 대선(大船)이니라, (어서1218쪽)고 말씀하십니다.
니치렌 불법이야말로 구극의 대승이며 전 인류를 태우는 ‘대선’입니다.
Q 대승과 소승은 수행의 내용도 전혀 다른가요.
A 괴로움이나 미혹의 원인은 ‘번뇌’(=탐,진,치의 생명) 라고 하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그 번뇌를 극복하는 것에 불교의 특징이 있습니다.
소승교는 번뇌를 단절함으로써 깨달음을 얻는다는 교의(敎義)입니다.
Q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모든 번뇌를 없엔다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명 그 자체를 소멸시키지 않으면 없어지지 않는……
A 거기에 대해 대승교는 소승교와 같이 번뇌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컨트롤하는 것을 설하였습니다. 청정하고 강력한 생명주체(불계)를 확립함으로써 번뇌를 ‘보리’라고 하는 깨달음의 지혜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을 ‘번뇌즉보리’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실천으로 말하면 번뇌에 정면으로 맞닥뜨려 묘법의 신심으로 번뇌를 자신의 성장의 인(因)으로 바꾸어 위대한 지혜를 몸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소승교는 분명히 번뇌가 인간의 고뇌의 원인이라고 주목한 점에서는 자신의 변혁에 대한 제일보였습니다. 그러나 욕망을 소멸시키는 수행에 전념하고, 그러기 위해서 현실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결과로 된 것은 큰 잘못입니다.
Q 소승교는 - 자신만의 행복, 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군요. 지금의 우리나라의 사회전체도 ‘나만이 좋으면, 이라는 풍조가 확산되어 남에게 대한 배려가 잃어져가는 추세입니다.
A 현실사회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이 본래의 불교정신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타인도 함께 행복해지자는 진정한 대승보살의 실천을 관철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 학회원입니다.
‘만인의 행복을 추구한다’ - 그 삶의 방식을 넓혀나가는 것이 ‘나만이 좋으면’ 이라는 이기주의 풍조를 타파하고 사회에 희망을 주는 행동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