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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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육노승에 대해 상세히 알고싶습니다
관리자
2021.04.27
593
안녕하십니까?한국 SGI교학부입니다.
* 임진왜란이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TV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일본군이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라고 쓰여 있는 깃발을 들고 조선을 침략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은 군국주의와 싸워온 국제창가학회(SGI)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그 당시는 일본 지방마다 무사들이 활약하던 때입니다. 그때 조선침략을 지휘한 장수 중 가토 기요마사는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佛法)에서 이탈한 일련종(미노부파)의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신앙의 힘을 빌리려고 법화경의 제목을 적은 깃발을 자신의 군사들이 타고 있던 배에 매달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종의 침략적 만행과 과오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물론 SGI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생명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전쟁에 협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전쟁은 살생을 금지하는 부처의 가르침과 전면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석존 재세시 사위국 파유리왕이 석존의 고국인 가비라위국을 침략해 석가족을 대량 학살했는데, 그 전쟁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했던 석존이 고뇌했던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도 전쟁으로 민중이 도탄에 빠진 막부시대 상황을 가슴아파하며, 세번에 걸쳐서 목숨을 건 국가 간효를 했습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전국의 사상통일을 획책하고 모든 종교가 전쟁을 찬양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때도 국가권력을 두려워한 승려들은 불법사상과 정면으로 배치해 전쟁을 미화하는 등 군국주의에 이용됐습니다. 그 속에서 마키구치 창가학회 초대 회장은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전쟁을 극구 반대하다 결국 옥사했습니다. 그러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뒤를 이어 도다 제2대 회장과 이케다 선생님은 대성인 불법은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주의 불법이라는 신념을 관철해 어떠한 전쟁이나 폭력도 부정했습니다. 1958년 역사적인 원수폭금지 선언은 이러한 평화절대주의 불교사상과 창가학회 이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결국 SGI가 인간생명 존중의 절대평화사상이 오늘날에 되살려졌고 또 계속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저술한 소설 ‘인간혁명’에 “전쟁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전쟁만큼 참혹한 것은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듯, 학회는 이처럼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이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글자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낙토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 <육노승>
대성인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육노승(六老僧)’이라 일컫는 본제자 여섯명을 정하셨습니다. ‘노승’이라 해서 연배가 있는 장년일 거라 상상하기 쉽지만 실은 여섯명 중 닛코 상인을 포함해 다섯명이 30대입니다. <그 여섯 명을 나이순으로 기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닛쇼(日昭) 62세, 니치로(日朗) 38세, 닛코(日興) 37세, 니치지(日持) 33세, 닛초(日頂) 31세, 니코(日向) 30세.>
젊기 때문에 더욱 앞으로의 투쟁, 제자의 투쟁에 기대를 거셨겠지요. 그러나 대성인이 기대하신 제자의 길을 관철한 사람은 닛코 상인뿐이었습니다. 다른 다섯명은(오노승)은 박해가 두려워 퇴전했습니다. 물론 오노승은 대성인이 재세할 때도 그 나름대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이라는 스승이 엄연히 계시기 때문에 꿋꿋이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런데 대성인이 돌아가시고 이번에는 자신이 제자들의 중심이 되면 박해가 더 심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대성인과 같은 마음으로 계속 투쟁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오노승은 마에 지고 말았습니다.이케다 선생님은 “중요한 것은 본제자로 뽑히느냐 어떠냐가 아닙니다. 제자 자신의 향후 행동으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스승과 같이 ‘투쟁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느냐 갖지 못하느냐. 이것이 닛코 상인과 오노승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수필 정의의 길 제4장>
* 임진왜란이나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TV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일본군이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라고 쓰여 있는 깃발을 들고 조선을 침략하는 모습을 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습은 군국주의와 싸워온 국제창가학회(SGI)의 역사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한 그 당시는 일본 지방마다 무사들이 활약하던 때입니다. 그때 조선침략을 지휘한 장수 중 가토 기요마사는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佛法)에서 이탈한 일련종(미노부파)의 신앙을 하고 있었는데,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신앙의 힘을 빌리려고 법화경의 제목을 적은 깃발을 자신의 군사들이 타고 있던 배에 매달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종의 침략적 만행과 과오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물론 SGI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생명 존엄을 최고의 가치로 삼기 때문에 전쟁에 협력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전쟁은 살생을 금지하는 부처의 가르침과 전면적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석존 재세시 사위국 파유리왕이 석존의 고국인 가비라위국을 침략해 석가족을 대량 학살했는데, 그 전쟁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고 했던 석존이 고뇌했던 일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니치렌(日蓮) 대성인도 전쟁으로 민중이 도탄에 빠진 막부시대 상황을 가슴아파하며, 세번에 걸쳐서 목숨을 건 국가 간효를 했습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전국의 사상통일을 획책하고 모든 종교가 전쟁을 찬양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이때도 국가권력을 두려워한 승려들은 불법사상과 정면으로 배치해 전쟁을 미화하는 등 군국주의에 이용됐습니다. 그 속에서 마키구치 창가학회 초대 회장은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전쟁을 극구 반대하다 결국 옥사했습니다. 그러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의 뒤를 이어 도다 제2대 회장과 이케다 선생님은 대성인 불법은 평화를 지향하는 인간주의 불법이라는 신념을 관철해 어떠한 전쟁이나 폭력도 부정했습니다. 1958년 역사적인 원수폭금지 선언은 이러한 평화절대주의 불교사상과 창가학회 이념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결국 SGI가 인간생명 존중의 절대평화사상이 오늘날에 되살려졌고 또 계속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저술한 소설 ‘인간혁명’에 “전쟁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전쟁만큼 참혹한 것은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듯, 학회는 이처럼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이 지구상에서 ‘비참’이라는 두글자를 없애고 영원한 평화낙토를 건설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습니다.
* <육노승>
대성인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육노승(六老僧)’이라 일컫는 본제자 여섯명을 정하셨습니다. ‘노승’이라 해서 연배가 있는 장년일 거라 상상하기 쉽지만 실은 여섯명 중 닛코 상인을 포함해 다섯명이 30대입니다. <그 여섯 명을 나이순으로 기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닛쇼(日昭) 62세, 니치로(日朗) 38세, 닛코(日興) 37세, 니치지(日持) 33세, 닛초(日頂) 31세, 니코(日向) 30세.>
젊기 때문에 더욱 앞으로의 투쟁, 제자의 투쟁에 기대를 거셨겠지요. 그러나 대성인이 기대하신 제자의 길을 관철한 사람은 닛코 상인뿐이었습니다. 다른 다섯명은(오노승)은 박해가 두려워 퇴전했습니다. 물론 오노승은 대성인이 재세할 때도 그 나름대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이라는 스승이 엄연히 계시기 때문에 꿋꿋이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런데 대성인이 돌아가시고 이번에는 자신이 제자들의 중심이 되면 박해가 더 심해질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대성인과 같은 마음으로 계속 투쟁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오노승은 마에 지고 말았습니다.이케다 선생님은 “중요한 것은 본제자로 뽑히느냐 어떠냐가 아닙니다. 제자 자신의 향후 행동으로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스승과 같이 ‘투쟁하는 마음’을 계속 가지느냐 갖지 못하느냐. 이것이 닛코 상인과 오노승의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수필 정의의 길 제4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