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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 Q&A

 

  • [RE]도조의 난

  • 관리자

  • 2019.11.18

  • 758

안녕하십니까?
한국SGI교학부입니다.

* 고마쓰바라(小松原)의 법난(도조의 난 이라고도 함) : 세 번째의 대난(大難)은 1263년 2월에 사면되시어 이토(伊東)에서 가마쿠라로 돌아오신 다음 해인 1264년 11월 11일에 일어난 고마쓰바라(小松原)의 법난(法難)입니다. 아와방면(安房方面)으로 홍교(弘敎)가신 때였습니다. 아마쓰의 구도요시다카(工藤吉隆)의 저택으로 향하시는 도중, 고마쓰바라에서 지두(地頭)인 도조가게노부(東條景信)의 군세(軍勢)에게 습격당하시어 구도요시다카(工藤吉隆)와 교닌보(鏡忍房)가 대성인을 외호하다 전사하고 대성인도 이마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 도조가게노부(東條景信) : 생몰 연대 미상. 아와(安房) 지방의 나가사 군(長狹郡) 도조 향(東條鄕)의 지두(地頭). 1264년 11월 11일에 아와 지방의 고마쓰바라(小松原)에서 대성인을 습격하여 상처를 입히고 대성인의 제자 교닌보(鏡忍房)와 구도요시타카(工藤吉隆)을 살해했습니다. 대성인이 최초로 설법한 곳인 세이초사가 원래는 염불신앙이 번창한 곳이었다는 것과 특히 지두인 도조가게노부(東條景信)가 열성적인 염불신앙자였다는 것도 연관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게노부는 염불신앙을 승려에게 강요할 정도로 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권력과 결탁한 당시의 염불종이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세이초사대중중(淸澄寺大衆中)〉에 “도조가게노부(東條景信)가 악인으로서 세이초사에서 기르고 있는 사슴을 사냥하고, 각방(各房)의 법사들을 염불자의 소종(所從)으로 하려고 했다”(어서 894쪽, 통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염불의 맹신자로 입도(入道)하여 렌지(蓮智)라고 불렸습니다. 막부의 호조 시게토키 등과 결탁하여 대성인에게 갖은 박해를 가했습니다. 고마쓰바라 법난이 일어난 지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

* 11월11일은 1264년(문영 원년), 대성인께서 ‘고마쓰바라 법난’을 겪으신 날입니다.
7백55년 전의 저녁 무렵. 아와(安房)지방 도조 마쓰바라(지금의 지바현 가모가와시)라는 큰길에서 대성인과 10명 정도의 제자들을 지두인 도조가게노부와 무장한 폭도들이 습격했습니다. 그 숫자는 어서에 “수백명”(1498쪽)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쏘는 화살은 비오듯 하고 내려 치는 칼은 번개와 같았다”(어서 1498쪽)라는 엄청난 습격이었습니다. 제자 한사람이 그 자리에서 죽고 두 사람은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대성인 자신도 베이고 맞아서 “결국 이것으로 마지막인듯”(어서 1498쪽, 취의)이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왼팔이 골절되고 이마 오른쪽에 약 12cm의 상처를 입으셨다고 합니다.
대성인께서는 박해를 가한 자들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석가여래를 위해서는 제바달다야말로 제일의 선지식이었다. 지금 세상을 보면 사람을 잘 되게 하는 것은 자기편보다도 강적이 사람을 더 성장시킨다” “니치렌이 부처가 되기 위한 제일의 자기편은 (대성인을 미워해 목숨을 노린) 도조가게노부이고, 승려로는 (권력과 결탁해 대성인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했던) 고쿠라쿠사 료칸, 겐초사 도류, 도아미다부쓰이며 또, (권력을 발동해서 대성인을 박해한) 헤이노사에몬노조, 호조도키무네전입니다. 그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니치렌은 어찌하여 법화경의 행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하며 기뻐하고 있다”(어서 917쪽, 통해) 박해를 가한 자가 있기 때문에 신심을 연마할 수 있습니다. 난을 이겨야 비로소 성불할 수 있습니다. 대성인께서 신명을 바쳐 체현하신 이런 엄숙한 불법의 도리를 마음속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 <어서의 세계 제2권> 법난 하. 63쪽-77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