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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 Q&A

 

  • [RE]학회 8월의 역사 알고 싶습니다.

  • 관리자

  • 2015.08.03

  • 1,230

안녕하십니까?
한국SGI교학부입니다.
<8월12일(1975년) ‘교육원점의 날’>
1975년 8월12일 교육부 하계강습회에 참석한 이케다 SGI회장은 “내 인생을 걸고 마지막 사업은 교육”이라며 교육혁명을 위한 강한 결의를 피력했다. 이후 이 날을 ‘교육부의 날’로 정한 교육부 벗은 인간교육의 연대를 넓혔다. 그리고 ‘교육본부’로 발전한 2002년 3월 새롭게 ‘교육원점의 날’이 됐다.
<8월14일(1975년) ‘신이치회의 날’>
‘신이치회(伸一會)’는 학회 창립 45주년인 1975년 5월3일 당시 청년부 중핵멤버가 모여 결성했다. ‘신이치회의 날’은 이케다 SGI회장과 도다 제2대 회장이 운명적으로 만났던 날로 결정했다. 이 모임 멤버들은 5기 3백명에 이르렀고 부이사장, 부회장, 현장 등의 리더 등 학회 인재뿐만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에서 최고의 인물로 성장했다.
<8월24일(1947년) ‘장년부의 날’>
제자는 19살, 스승은 47살이었다. 그것은 민중 대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제’의 만남이었다. 1947년 8월14일 밤, 젊은 날의 이케다 SGI회장은 친구의 권유로 도쿄 우라다에서 열린 좌담회에 참석했다. 좌담회 장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경이었다.현관에 들어서자 활력 넘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다 제2대 회장이 <입정안국론>을 강의하고 있었다.강의가 끝나고 소개받은 이케다 청년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올바른 인생이란 도대체 어떤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까?” 또 “진정한 애국자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란?” “천황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했다. 도다 제2대 회장은 하나하나의 날카로운 질문에 명쾌한 답으로 응수했다.
희망의 인생을 사는 확고한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줄 ‘스승’에 목말랐던 이케다 청년의 마음에, 확신에 넘친 대답은 그대로 가슴 속 깊이 새겨졌다. 이케다 청년은 감사와 결의를 즉흥시로 화답했다. “방랑자여/어디서 와서/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10일 후인 8월24일, 이케다 청년은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 이 때 심정을 SGI회장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나는 모든 차원을 초월해 도다 조세이라는 인격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을 던져 내게 부딛쳐라! 청년답게 공부하고 용감하게 실천하지 않겠는가!’라고 선생님은 내게 말씀하셨다. 나도 또한 청년의 직감으로 ‘태평양전쟁 중에, 평화를 위해, 불법을 위해 투옥된 이 사람을 따라가겠다’라고 확신했다.”(수필 ‘신·인간혁명’ <불이의 여행 ‘8·24’>) ‘사제’ -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한다. 이후 58성상. SGI회장은 사제의 길을 걸으며 세계에 광포의 길을 열었다. 정의의 불법은 지금 세계 1백90개국으로 넓혀졌다. 그 투쟁은 위대한 불법과 위대한 스승을 가진 한사람이 일어선다면 전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엄연한 증명인 셈이다.
<8월29일(1971년) ‘국제부의 날’>
1968년 8월29일, 이케다 SGI회장은 일본을 방문한 각국 SGI 멤버를 그늘에서 지켰던 통역과 번역을 담당했던 멤버들을 격려하며 관계자의 성장에 큰 기대를 보냈다. 나습그룹(남자), 근대어학그룹(여자)을 결성했고 이것이 연원이 돼 3년 후인 1971년 8월29일 ‘국제부’를 결성했다.
<8월31일(1962년) ‘대학부의 날’>
1962년 8월31일, 이케다 SGI회장이 대학부 대표에게 <어의구전> 강의를 시작한 날이다. 격무 속에서 영지의 학생들을 위한 강의는 월 1회, 약 5년간 계속됐고, 그 와중에 간사이 교토대학교에서 <백육개초> 강의를 하는 등 손수 후계 인재를 육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