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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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진치의 삼독
관리자
2010.08.13
1,358
안녕하십니까?
한국SGI교학부입니다.
탐.진.치란 번뇌의 삼독(三毒)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번뇌의 근본입니다.
탐(貪)은 매우 탐내다.욕망을 말하며, 진(瞋)은 노여움,감정에 사로잡혀 올바른 가치판단을 못하는 것을 말하며, 치(癡)는 어리석음,눈앞의 일에만 좌우되어 앞응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탐이란 탐욕,탐애,미치도록 사랑하는 것. 진이란 진애,노여움을 말하며,치란우치,무지,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소야전답서에는 [감겁의 때는 소의 삼재가 일어나니 소위 기갈,역병,합전이니라. 기갈은 대탐에서 일어나고, 역병은 우치에서 일어나고,합전은 진에에서 일어나도다] 라고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참고로 공부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번뇌즉보리.
「惡」의 근원은 「欲望」
현대문명이 벽에 부딪치게 된 것은 인간성의 근본에 관계되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인류의 영지(英智)가 얼마나 미흡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명, 사회의 결함은 실은 사회적 기구적 불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명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은데에 본질적인 연원(淵源)이 있으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회와 문명상에 나타난 모든 모순은 그것이 투사(投射)된 영상(映像)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욕망은 피하지 말고 승화시켜야
이러한 인간성의 문제를 열거하면 여러가지 쟁점이 되겠지만, 지금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문제로서 인간의 욕망론을 들수 있다. 그것은 「공해」에 관한 논의를 파내려가면 결국, 인간의 욕망이라는 문제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망이라는 문제가 귀찮은 것은, 많은 「惡」을 만들어내고 있는 근원은 틀림없이 욕망인데, 그렇다면 인간으로부터 욕망이라는 것을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욕망을 없애버리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욕망이 있을 때보다도 훨씬 두려운 사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욕망을 단절해야 하는가의 논의는, 본래 그 발상이 행복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있다. 욕망을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욕망이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으며, 욕망이 있는 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욕망이 없어지면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긍정할 수 있다.
그것은 행복을 단순히 욕망에 좌우되지 않는 평온무사한 심적상태로 하는가, 자유자재로 활동하여 이 세상의 가치있는 물건을 손안에 넣는 것을 행복이라고 할 것인가, 말하자면 행복관의 차이에 관련되는 것이다. 똑 같은 행복이라 해도 포착하는 방법에는 본래 개개인의 차가 있으며, 그것을 상호간에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러한 행복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욕망이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며 행복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으로 된다. 욕망은 없애버릴 것이 아니라 잘 승화시켜야 한다.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욕망은 인간성의 본질적인 것이므로, 이 도전은 인간성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싸움이기도 하다. 이것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해결한 철학이 佛法의 번뇌즉보리의 원리이다.
욕망, 怒함, 어리석음도 번뇌
번뇌는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운 것을 뜻하는 말이다. 생활상의 현상을 보면 알수 있듯이 번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욕망은 그 중의 하나로서, 감정이 흥분하여 노하는 것도 번뇌이며 어리석은 것도 번뇌이다. 佛法에서는 근본적인 번뇌로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견(見)을 세우고, 또한 파생적인 것으로서 여러 종류의 번뇌로 구별하고 있다.
百八煩惱라든가 八方四千의 煩惱라는 것이 그것이며, 제야(除夜)의 종을 108회 치는 것도 百八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日蓮正宗의 주수(珠數)는 108개의 구슬을 잇고, 그 속에 약간 작은 4개의 구슬이 이어져 있다. 이것은 百八번뇌와 四菩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八만四천의 번뇌는 釋尊一代의 설법을 八万四千法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八만四천의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 설한 法이라는데서 이렇게 부르고 있다. 菩提는 부처의 정각(正覺)의 지혜, 깨달음의 경애를 뜻하는 것이다. 석존이 佛法의 최고의 깨달음에 대해서「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 것은, 다른 외도(外道)나 방편권교(方便權敎)의 깨달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아뇩다라」는 無上이라는 말이고, 「삼먁」은 정등(正等)·정편을 의미하며「삼보리」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이 무상의 보리를 구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며 즉, 보살은 佛法의 극리(極理)를 구해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구명한 사람이 부처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보살은 本果와 本因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근본 번뇌인 탐·진·치·만·의·견은 각각 六道·九界에 배치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다시한번 깊이 논하면, 탐욕은 아귀계뿐만이 아니라 十界 전반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天界는 권력층·지배계층을 말하는데, 그들의 끊임없는 권력욕·지배욕은 천계에 갖추고 있는 아귀계이다. 학자의 지식욕은 성문계의 탐욕이며, 예술가의 美의 추구는 연각계의 탐욕이며 아귀계이다.
보살이 佛道를 구하여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살계에 갖추어진 탐욕이다. 만일 이 욕망이 없으면 보살의 수행 등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성문이 성문다운 것도 지식을 구하여 배우려고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며, 연각이 연각다운 것도 美에 대한 끊임없는 창작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이나 치,만, 의, 견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십계호구의 법리(法理)에서 볼때 당연하다.
번뇌는 피하지 말고 정면 도전해야
이것은 또한 생리학적으로 보면 더욱 명백하다. 유기적인 원리에 의해서 성립된 생명체라는 것은 끊임없이 외계로부터 물질을 섭취하여 그것을 소화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유지를 위해서 물질의 보급을 요구하는 것은 생명의 본연이며, 그것이 정지했을 때는 죽음밖에는 없다.
한국SGI교학부입니다.
탐.진.치란 번뇌의 삼독(三毒)을 말하는 것으로, 일체번뇌의 근본입니다.
탐(貪)은 매우 탐내다.욕망을 말하며, 진(瞋)은 노여움,감정에 사로잡혀 올바른 가치판단을 못하는 것을 말하며, 치(癡)는 어리석음,눈앞의 일에만 좌우되어 앞응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탐이란 탐욕,탐애,미치도록 사랑하는 것. 진이란 진애,노여움을 말하며,치란우치,무지,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소야전답서에는 [감겁의 때는 소의 삼재가 일어나니 소위 기갈,역병,합전이니라. 기갈은 대탐에서 일어나고, 역병은 우치에서 일어나고,합전은 진에에서 일어나도다] 라고있습니다. 다음 내용은 참고로 공부하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불법에서 말하는 번뇌즉보리.
「惡」의 근원은 「欲望」
현대문명이 벽에 부딪치게 된 것은 인간성의 근본에 관계되는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인류의 영지(英智)가 얼마나 미흡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문명, 사회의 결함은 실은 사회적 기구적 불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생명의 근본문제가 해결되지 않은데에 본질적인 연원(淵源)이 있으며,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회와 문명상에 나타난 모든 모순은 그것이 투사(投射)된 영상(映像)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욕망은 피하지 말고 승화시켜야
이러한 인간성의 문제를 열거하면 여러가지 쟁점이 되겠지만, 지금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문제로서 인간의 욕망론을 들수 있다. 그것은 「공해」에 관한 논의를 파내려가면 결국, 인간의 욕망이라는 문제에 귀착하지 않을 수 없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욕망이라는 문제가 귀찮은 것은, 많은 「惡」을 만들어내고 있는 근원은 틀림없이 욕망인데, 그렇다면 인간으로부터 욕망이라는 것을 없애버릴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욕망을 없애버리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욕망이 있을 때보다도 훨씬 두려운 사태에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욕망을 단절해야 하는가의 논의는, 본래 그 발상이 행복을 어떻게 실현하느냐에 있다. 욕망을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욕망이 인간의 행복을 방해하고 있으며, 욕망이 있는 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관점에 서있는 것이다.
그래서 반대로 욕망이 없어지면 행복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긍정할 수 있다.
그것은 행복을 단순히 욕망에 좌우되지 않는 평온무사한 심적상태로 하는가, 자유자재로 활동하여 이 세상의 가치있는 물건을 손안에 넣는 것을 행복이라고 할 것인가, 말하자면 행복관의 차이에 관련되는 것이다. 똑 같은 행복이라 해도 포착하는 방법에는 본래 개개인의 차가 있으며, 그것을 상호간에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이러한 행복관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욕망이 불행의 근원이기도 하며 행복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으로 된다. 욕망은 없애버릴 것이 아니라 잘 승화시켜야 한다.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지배하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욕망은 인간성의 본질적인 것이므로, 이 도전은 인간성 자체에 대한 근원적인 싸움이기도 하다. 이것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해결한 철학이 佛法의 번뇌즉보리의 원리이다.
욕망, 怒함, 어리석음도 번뇌
번뇌는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운 것을 뜻하는 말이다. 생활상의 현상을 보면 알수 있듯이 번뇌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욕망은 그 중의 하나로서, 감정이 흥분하여 노하는 것도 번뇌이며 어리석은 것도 번뇌이다. 佛法에서는 근본적인 번뇌로서 탐(貪) ·진(瞋) ·치(痴) ·만(慢) ·의(疑) ·견(見)을 세우고, 또한 파생적인 것으로서 여러 종류의 번뇌로 구별하고 있다.
百八煩惱라든가 八方四千의 煩惱라는 것이 그것이며, 제야(除夜)의 종을 108회 치는 것도 百八번뇌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日蓮正宗의 주수(珠數)는 108개의 구슬을 잇고, 그 속에 약간 작은 4개의 구슬이 이어져 있다. 이것은 百八번뇌와 四菩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八만四천의 번뇌는 釋尊一代의 설법을 八万四千法門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八만四천의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 설한 法이라는데서 이렇게 부르고 있다. 菩提는 부처의 정각(正覺)의 지혜, 깨달음의 경애를 뜻하는 것이다. 석존이 佛法의 최고의 깨달음에 대해서「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 것은, 다른 외도(外道)나 방편권교(方便權敎)의 깨달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아뇩다라」는 無上이라는 말이고, 「삼먁」은 정등(正等)·정편을 의미하며「삼보리」는 완전한 깨달음이라는 뜻이다. 이 무상의 보리를 구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하며 즉, 보살은 佛法의 극리(極理)를 구해서 수행하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을 구명한 사람이 부처이다. 그러므로 부처와 보살은 本果와 本因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근본 번뇌인 탐·진·치·만·의·견은 각각 六道·九界에 배치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다시한번 깊이 논하면, 탐욕은 아귀계뿐만이 아니라 十界 전반에 걸쳐 존재하고 있다.
天界는 권력층·지배계층을 말하는데, 그들의 끊임없는 권력욕·지배욕은 천계에 갖추고 있는 아귀계이다. 학자의 지식욕은 성문계의 탐욕이며, 예술가의 美의 추구는 연각계의 탐욕이며 아귀계이다.
보살이 佛道를 구하여 고민하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살계에 갖추어진 탐욕이다. 만일 이 욕망이 없으면 보살의 수행 등은 있을 수 없게 된다. 성문이 성문다운 것도 지식을 구하여 배우려고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이며, 연각이 연각다운 것도 美에 대한 끊임없는 창작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이나 치,만, 의, 견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십계호구의 법리(法理)에서 볼때 당연하다.
번뇌는 피하지 말고 정면 도전해야
이것은 또한 생리학적으로 보면 더욱 명백하다. 유기적인 원리에 의해서 성립된 생명체라는 것은 끊임없이 외계로부터 물질을 섭취하여 그것을 소화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생명유지를 위해서 물질의 보급을 요구하는 것은 생명의 본연이며, 그것이 정지했을 때는 죽음밖에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