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학 Q&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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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훌륭한 질문입니다.
관리자
2009.06.02
713
안녕하십니까?
한국SGI 교학부입니다.
상기 질문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일전에 사이토 교학부장 청년부 강의(2005년)에서 이와 아주 유사한 질문이 나왔었습니다. 사이토 교학부장님께서는 아주 훌륭한 질문이라고 하시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해 주셨습니다. 즉석에서 나온 질문이고, 즉석 답변이었기 때문에 문장 형태로 완성도 있게 답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답변을 이해하시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되어 조금 다듬은 답변을 실어드립니다.
질문자께서는 이러한 수준의 질문을 하신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교학력을 지녔다고 사료되어 이를 전제로 답변을 다듬어 드립니다.
참고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Q(청년부) : 본미유선이라는 사고 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말법 시대에는 석존과 연이 없는 중생만이 태어난다고 하며, 본미유선의 중생이라고 하는가요?
A(사이토) : 먼저, 말씀드릴 부분은 본미유선, 본이유선의 개념은 후세의 사람들이 법화경을 기준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석존은 구원에 성불을 해서 계속 생사생사를 반복을 하는 속에 중생을 교화시키는 하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을 맺은 중생에 대해서 석존 재세시의 법화경으로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의 틀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동안 과거세에 석존의 화도를 받고도 성불하지 못했던 중생들이 정법∙상법 시대에 다시 태어나서 성불을 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천태교학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태교학의 구도에서 본다면 말법에는 석존의 화도를 받지 못한 중생이 말법에 태어나기 때문에 새롭게 그러한 화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화경이라고 하는 이야기 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본질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직접적으로 불성을 촉구하는 가르침을 받는 것을 하종이라고 부릅니다. 간접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는 불성을 촉구하는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석존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직접적으로 불성을 촉구하지 못하는, 그런 간접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법이라고 하는 시대는 방법(謗法)의 시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모르고 또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절대 없다라고 하여, 절대 못 믿는 것도 방법에 해당되는데요, 불성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비방을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강한 이 말법의 시대에서 석존의 이러한 간접적인 가르침은 불성을 강하게 촉구하는 힘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법시대에 사람들은 그러한 석존의 간접적인 가르침으로는 불성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의 간접적인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연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전환시킨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십니다.
그 하종불법에서 말하는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자칫 저희가 생각하면 대성인께서 씨앗을 심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잘 생각해 보면 자기자신 생명 속에 이미 그 씨앗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을 심는가 하는 부분이 아니고 자신 속에 갖추어진 불성이라고 하는 씨앗을 촉구하는 방법이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 하는 방법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더 강조 드립니다만 부처가 씨앗을 심는다고 보여지는 하종불법에서 말하는 씨앗을 심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모습이 실은 각자의 생명 속에 갖추어져 있는 씨앗에 그 씨앗을 흔들어서 나타나게 하고, 거기에 응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종이라고 하는 씨앗을 싹트게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성인의 불법은 직접적으로 씨앗을 뿌린다고 하는, 즉 불성을 뒤흔들어 일으킨다고 하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맨 처음에 천태의 레벨에서 말씀드렸던 그 부분에서 예를 들어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한번 간추리면, 석존에게 아무런 하종도 받지 못하고 간접적인 가르침을 전혀 받지 못했던, 석존과 연이 없는 중생은 말법에는 무연의 중생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그러한 설명 방법은 바로 석존의 입장에서 이것을 해석한 것입니다.
불종을 하종한다고 하므로 씨앗을 심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불성이 원래 생명에 구족되어 있다는 것은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이 하종을 설명한 것이 됩니다. 불법에서는 인과 연이 있어서 바로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포착하는 방법을 연기론이라고 합니다만, 그 인과 연은 바로 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은 불성을 뒤흔드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인과 연인 합치를 해야만 그 결과로서 성불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원래 갖추고 있던 불성이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뒤흔들어져서 그 불성이 촉구를 받아서 바로 그 씨앗이 성장을 했을 때 성불이라고 합니다. 이 때 ‘성불은 그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르침에 해당하는 연도 씨앗이 될 수 있고, 또 원래 구족된 불성도(즉 씨앗의 인)도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씨앗이라고 하는 부분에는 반드시 그러한 인에나 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면에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해 주신 질문은 정말 훌륭한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종문의 교학에서는 아주 이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이 개목초 강의입니다.
한국SGI 교학부입니다.
상기 질문은 대단히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일전에 사이토 교학부장 청년부 강의(2005년)에서 이와 아주 유사한 질문이 나왔었습니다. 사이토 교학부장님께서는 아주 훌륭한 질문이라고 하시면서, 아래와 같이 답변해 주셨습니다. 즉석에서 나온 질문이고, 즉석 답변이었기 때문에 문장 형태로 완성도 있게 답변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답변을 이해하시는데에는 큰 지장이 없으리라 생각되어 조금 다듬은 답변을 실어드립니다.
질문자께서는 이러한 수준의 질문을 하신다는 것은 높은 수준의 교학력을 지녔다고 사료되어 이를 전제로 답변을 다듬어 드립니다.
참고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Q(청년부) : 본미유선이라는 사고 방식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말법 시대에는 석존과 연이 없는 중생만이 태어난다고 하며, 본미유선의 중생이라고 하는가요?
A(사이토) : 먼저, 말씀드릴 부분은 본미유선, 본이유선의 개념은 후세의 사람들이 법화경을 기준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석존은 구원에 성불을 해서 계속 생사생사를 반복을 하는 속에 중생을 교화시키는 하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연을 맺은 중생에 대해서 석존 재세시의 법화경으로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의 틀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그 동안 과거세에 석존의 화도를 받고도 성불하지 못했던 중생들이 정법∙상법 시대에 다시 태어나서 성불을 하게 된다는 내용으로 천태교학에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태교학의 구도에서 본다면 말법에는 석존의 화도를 받지 못한 중생이 말법에 태어나기 때문에 새롭게 그러한 화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화경이라고 하는 이야기 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 본질에 대해서 말씀 드리면 직접적으로 불성을 촉구하는 가르침을 받는 것을 하종이라고 부릅니다. 간접적인 가르침에 의해서는 불성을 촉구하는 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석존의 가르침은 기본적으로 직접적으로 불성을 촉구하지 못하는, 그런 간접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법이라고 하는 시대는 방법(謗法)의 시대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모르고 또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절대 없다라고 하여, 절대 못 믿는 것도 방법에 해당되는데요, 불성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하면서 비방을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강한 이 말법의 시대에서 석존의 이러한 간접적인 가르침은 불성을 강하게 촉구하는 힘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법시대에 사람들은 그러한 석존의 간접적인 가르침으로는 불성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석존의 간접적인 가르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연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적인 가르침으로 전환시킨 분이 니치렌 대성인이십니다.
그 하종불법에서 말하는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자칫 저희가 생각하면 대성인께서 씨앗을 심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잘 생각해 보면 자기자신 생명 속에 이미 그 씨앗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 씨앗을 심는가 하는 부분이 아니고 자신 속에 갖추어진 불성이라고 하는 씨앗을 촉구하는 방법이 직접적인가 간접적인가 하는 방법의 차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더 강조 드립니다만 부처가 씨앗을 심는다고 보여지는 하종불법에서 말하는 씨앗을 심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모습이 실은 각자의 생명 속에 갖추어져 있는 씨앗에 그 씨앗을 흔들어서 나타나게 하고, 거기에 응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불종이라고 하는 씨앗을 싹트게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성인의 불법은 직접적으로 씨앗을 뿌린다고 하는, 즉 불성을 뒤흔들어 일으킨다고 하는 의미에서 직접적인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맨 처음에 천태의 레벨에서 말씀드렸던 그 부분에서 예를 들어 말씀드렸던 것을 다시 한번 간추리면, 석존에게 아무런 하종도 받지 못하고 간접적인 가르침을 전혀 받지 못했던, 석존과 연이 없는 중생은 말법에는 무연의 중생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그러한 설명 방법은 바로 석존의 입장에서 이것을 해석한 것입니다.
불종을 하종한다고 하므로 씨앗을 심은 것처럼 보입니다만, 불성이 원래 생명에 구족되어 있다는 것은 대성인의 불법의 입장에서 이 하종을 설명한 것이 됩니다. 불법에서는 인과 연이 있어서 바로 결과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게 포착하는 방법을 연기론이라고 합니다만, 그 인과 연은 바로 불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은 불성을 뒤흔드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인과 연인 합치를 해야만 그 결과로서 성불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원래 갖추고 있던 불성이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아서 뒤흔들어져서 그 불성이 촉구를 받아서 바로 그 씨앗이 성장을 했을 때 성불이라고 합니다. 이 때 ‘성불은 그 씨앗이 열매를 맺은 것’이라는 표현을 써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씨앗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르침에 해당하는 연도 씨앗이 될 수 있고, 또 원래 구족된 불성도(즉 씨앗의 인)도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씨앗이라고 하는 부분에는 반드시 그러한 인에나 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면에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해 주신 질문은 정말 훌륭한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종문의 교학에서는 아주 이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케다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이 개목초 강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