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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죠세이(戶田城聖)의 생명론(生命論)
허정화
2011-04-22
4,567
도다죠세이(戶田城聖)의 생명론(生命論)
▼ 생명의 불가사의
일본의 신도(神道)가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 전체주의(全體主義)에 이용당하여 마침내는
무모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은사 마키구치 쓰
네사부로(牧口常三郞)선생님 및 친애하는 동지와 함께 당시의 종문정책(宗門政策)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역설(力說)하였다.
즉 일본국민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조한 것의 비논리적(非論理的), 비도덕적(非道德
的)인 이유를 설했던 것이지만, 그 때문에 一九四三년 여름 탄압을 받았고 그 후 二년의 구
치소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차가운 구치소에 죄도 없이 붙들려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깊은 사색(思索)은 사
색을 불러 마침내는 인생의 근본문제이며, 더구나 극히 난해(難解)한 문제인 "생명의 본질"
에 부딪쳤던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영구히 계속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수수께끼이고 더구나
고래(古來)의 성인(聖人), 현인(賢人)이라고 칭송되는 사람들은 각인각색으로 이 문제의 해
결을 설해 왔다.
불결한 구치소에는 이(蟲)가 곧잘 번식한다. 따뜻한 봄볕을 쬐어 이들은 슬슬 놀러 기어 나
왔다. 나는 두 마리의 이를 판자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더니 그것들은 열심히 수족(手足)을
내저었다. 먼저 한 마리를 눌러 죽였지만, 다른 한 마리는 그런 일에 아랑곳없이 움직이고
있다. 눌러 죽인 이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영구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
일까.
또 벚꽃나무가 있다. 그 가지를 꺾어 꽃병에 꽂아 두었더니, 이윽고 봉우리는 꽃이 피고 푸
른 잎도 핀다. 이 벚나무 가지의 생명과 본래 벚나무의 생명과는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생명이란 더욱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 옛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딸이 죽어서 번민하며 괴로움에 빠진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때, 자신은 딸이 죽자 그렇게까지 괴로워했는데, 만약 아내가 죽는다면(그 아내도 죽어
자신을 슬프게 하였지만) 만약 아버지가 죽는다면 (그 아버지도 죽어서 나는 많이 울었지
만)라고 생각했을 때에 몸을 떨며 그리고 자기자신이 죽음에 직면한다면 어떨까 라고 생각
하면 현기증이 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는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의하거나 하여
끊임없이 길을 구해 왔지만, 아무래도 생명의 문제에 관해 마음의 근저에서 납득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 번민을 또한 독방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과학, 수학의 연구
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론적(理論的)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법화경과 日蓮대성인의 어서를 배독했다. 그리고 법화경의
불가사의한 구절을 만나 이것을 몸으로 독파하고 싶다고 염원하여,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제
목을 불러갔다. 제목수가 거의 이백만번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매우 불가사의한 일에 부딪쳐
일찍이 생각할 수 없었던 경지(境地)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기쁨에 떨면서 혼자 독방에 서서
삼세시방(三世十方) 의 불(佛), 보살(菩薩), 일체 중생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 것이다.
늦기를 五년으로써 미혹하지 않고, 앞서기를 五년으로써 천명(天命)을 알았노라.
이러한 체험에서 나는 지금 법화경의 생명관에 입각하여 생명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삼세(三世)의 생명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가로되, "모든 선남자(善男子)여, 여래(如來)는 모든 중생의, 소법
(小法)을 원하는 덕박구중(德薄垢重)의 자를 보고서는 이 사람을 위하여 나는 젊어서 출가
(出家)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득했다고 설하도다. 그런데 나는 실로 성불(成佛)한 이래
구원(久遠)함이 이와 같도다"
자아게(自我偈)에 가로되 "나는 부처를 득한 이래 거치는 바의 모든 겁수 무량백천만억(無
量百千萬億) 나유타 아승기(阿僧祈)이니라"(同쪽)
이 경문은 법화경의 극히 일부이지만 대개 석존일대(一代)의 불교는 생명의 전세(前世), 현
세(現世) 및 내세(來世)의, 소위 삼세(三世)의 생명을 대전제(大前提)로 설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삼세의 생명관을 빼버리고, 생명은 현세만 있다고 하게 되면 불교철학은
완전히 그 근거(根據)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 경전(經典)에는 생
명의 원근(遠近), 광협(廣挾)에 따라 그 경전의 고하천심(高下淺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日蓮대성인에 있어서도 삼세의 생명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단
석존보다도 대성인은 생명의 존재를 보다 깊게, 보다 본원적(本源的)으로 생각하시고 있는
것이다. 중략(中略)
▼ 영원한 생명(生命)
인간의 생명은 삼세에 걸친다고 하지만 그 길이는 어떠한지 이것이야말로 또한 불법의 근간
(根幹)이기 때문에 여기에 경문(經文)을 인용한다.
법화경여래수량품(法華經如來壽量品)에 가로되
"그런데 선남자(善男子)여, 나는 실로 성불(成佛)한 이래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無量無
邊百千萬億那由陀劫)이니라. (중략)이 이래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서 설법교화(說法
敎化)하도다"
이 경문은 석존의 수많은 경문중(經文中)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깨달음의 가장 근본이다.
그 대의(大意)를 말한다면 "너희들은 모두 내가 이 세상에서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
지만, 실은 자신이 부처가 된 것은 지금부터 오백진점겁(五百塵点劫)이라는 헤아릴 수도 없
을 만큼의 옛날에 성불하여, 항상 이 사바세계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이
며, 자신의 생명은 현세만의 것이 아니고 또한 깨달음도 현세만의 것이 아니라 영구한 옛날
부터의 존재인 것이다 라고 갈파(喝破)하고 있는 것이다.(중략)
日蓮대성인에게 있어서는 석존이 부처의 경계(境界)에서 구원의 생명을 관(觀)한데 대하여,
대성인은 명자즉(名字卽)의 범부위(凡夫位)에 있어서 본유(本有)의 생명, 상주(常住)의 부처
를 설하시고 있다. 즉 범부인 우리들의 모습 자체가 무시본유(無始本有)의 모습이다. 순간은
영원을 내포하고 영원은 순간의 연속이다. 구원이란 작용하지않고, 꾸미지도 않고, 본래 그
대로라고 설해져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부처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석존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은 본적
(本迹)이 함께 이상(理上)의 법상(法相)이며, 범부(凡夫)의 당체본유(當體本有) 그대로에 있
어서 몸에 지닌, 대성인의 직달정관(直達正觀), 사행(事行)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야말로 가
장 생명의 실체를 보다 본원적으로 설해 밝히시고 있는 것이라고 배견된다.
사적으로 회통(會通)을 가하여 본문(本文)을 그르치게 하는 두려움이 있기는 하나 그 일단
(一端)을 말해 보겠다.
생명이란 우주와 더불어 존재하고, 우주보다 앞서지도 않았으며, 나중에 우발적으로 혹은 누
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생긴 것도 아니다. 우주자체가 이미 생명 그 자체이며, 지구만의 전유
물(專有物)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들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성인의 자비를 받아 직달정관사행(直達正觀事行)의 일념
삼천의 대어본존(大御本尊)에게 귀의하여 받들어 "묘(妙)"인 생명의 실체파악에 면려하고 있
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 생명의 연속
생명은 영구(永久)하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바 이지만, 이 사고법
(思考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관념적으로 다만 〃영원〃하다고 주장하여, 어
렴풋이 믿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이런 관념적인 영원은 우리들이 취하지 않는 바이다.
또한 자손(子孫)에게 생명이 전달되고 그 자손에 전달되는 생명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으나 이렇다면 영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손자가 단멸(斷滅)하게
된다면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지구가 멸망한다면 없어지는 그러한 생명으로는 영원
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자손과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실제로 지금 살아있는 아들 속
에 같이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되며, 매우 불합리(不合理)하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사후(死後)의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자손의 몸을 자신의 묘
소와 같이 생각하는 천박한 생명관이며, 영구한 생명을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유명한 다카야마 초규(高山樗牛)선생은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한다. 그 위대한 일은 후세
에도 남는다. 그 후세에 남은 위대한 일에 자신은 살아 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초규선생은 위대한 문학자(文學者)이니 만큼 나는 매우 고심한 것이다.
만약 선생의 말과 같다면 평범한 우리들이나 개나 고양이는 영구한 생명이라 할 수 없게된
다. 따라서 이 경우의 영원한 생명에는 보편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정말인가, 거짓
말인가하고 괴로워한 결과, 그는 위대한 문학자이지만, 사후의 생명에 관해서는 매우 천박한
사고법이라고 하는 결론에 달하였다.
한 약간 이론적이지만, 사실과는 상위(相違)하고 있는 생명론으로, 생물에게는 뭔가 영혼이
라는 그러한 것이 있어 그것이 영구히 전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진실과 같이 생각되므로 상당한 학자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그러한 것도 불교철학의 대상으로서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석존은 열반경 속에서
철저하게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즉 이 사고법은 사견(邪見)이고, 바른 것이 아닌 것으로 되
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양으로 하여 모든 것의 생명이 연속하는 것일까.
사후의 문제는 불교철학에서도 상당히 최고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소질이 없는 사람에 대해
서는 잘못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이것을 생략하기로 하고 더없이 상식론적(常識論的)으
로 다루고자 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수량품(壽量品)의 자아게 에서는 "방편현열반(方便現涅槃)"이라고 있어, 죽음을 하나의 방편
이라고 설해져 있다. 예를 들어보면, 잔다고 하는 것은, 일어나서 활동한다고 하는 인간본래
의 목적에서 보면 단순한 방편이다. 인간이 활동한다고 하는 면에서 보면 잘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자지 않으면 피로는 풀 수 없고, 또한 발랄한 활동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도 노인이 되거나 병이 들어 국부(局部)가 파산되거나 한 경우에 있어서 아
무래도 죽음이라는 방편에서 젊음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불법의 극리는 일념삼천이지만, 사후의 생명도 또한 일념삼천과의 관련에서 해결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개목초(開目抄)"에 "일념삼천은 십계호구(十界互具)로 부터
시작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관심의 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는 십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努)하며, 어느 때는 평온(平
穩)하고 어느 때는 탐(貪)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諂曲)
이니라. 노함은 지옥(地獄), 탐함은 아귀(餓 鬼), 어리석음은 축생(畜生), 첨곡함은 수라(修
羅), 기뻐함을 천(天), 평온함은 인(人)이니라. 세간(世間)의 무상(無常)은 눈앞에 있으니 어
찌 인계에 이승계(二乘界)가 없으리오, 무고(無顧)의 악인(惡人)도 역시 처자(妻子)를 자애
(慈 愛)하니 보살계(菩薩界)의 일분(一分)이니라. 단 불계(佛界)만은 나타내기 어렵도다" 운
운(어서二四一쪽)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마음의 상태를 곰곰히 사색하게 되면 순간순간에, 일념일념
(一念一念)이 이렇게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탐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노함이다. 그리고 두개의 생각이 일시에 일어나는 일은 결코 있을수 없는 것
이다.
여기에서 조금 설명을 더하고 싶은 것은 본존초(本尊抄)에서 "불계(佛 界)만은 나타내기 어
렵도다"라고 있지만, 그 불계를 나타내는 연(緣)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日蓮대성인의 불법
의 극리는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이며, 실천의 형태는 삼대비법(三大秘法)에 있다. 그러므로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본존님을 신앙하는 것만이 그 연(緣)이 되어 즉신성불(卽身成佛)을 할
수 있는 것이다.(중략)
우리들의 마음의 작용을 보건대 기쁘다고 해도 그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 기쁨
은 영혼(靈魂)과 같은 것이, 어딘가에 가 버린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어딘가에 녹아 들어가,
어디를 찾아 보아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몇 시간이나 며칠 후가 되면 또한 같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또한 어떤 일에 의
해 슬퍼한다고 하자. 몇 시간이나 며칠인가 지나서, 그것을 생각해 내어 또한 같은 슬픔을
새롭게 했다고 하지만, 앞의 슬픔과 뒤의 슬픔과 훌륭한 연속이며 그 중간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같은 그러한 현상이 우리들의 일상의 수면의 경우에도 있다. 자고 있는 동안에 마음은 어디
에도 없다. 그런데 잠을 깨자마자 마음은 활동한다. 수면을 취한 경우에는 마음이 없고, 깨
어 있는 경우에는 마음이 있다. 있는 것이 진짜인가, 없는 것이 진짜인가,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유무(有無)를 논(論)할 수 없다고 하는 사고법을, 이것을 공관(空觀)이라고도 묘
(妙)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소우주(小宇宙)인 우리들의 육체에서 마음이라든지, 마음의 작
용이라든지 하는 것을 사색하여, 이것을 불법철학의 가르침을 받아 진실한 생명의 연속인
유무(有無)를 결론짓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우주는 즉 생명이므로 우리들이 죽는다고 하자. 죽은 생명은 마치
슬픔과 슬픔과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듯이, 기쁨과 기쁨의 사이에, 기쁨이 어디에도 없었
듯이, 자고있는 동안 그 마음이 어디에도 없듯이, 사후의 생명은 우주의 대 생명으로 들어가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大 自然)속으로 들어갔다
고 해도 결코 안식(安息)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자는 것이 안식이라고 단정
해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고 있는 동안 안식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괴로운 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얕은 잠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사후의 대생명(大生命)에 녹아 들어간 모습은 경문에 눈을 뜨고, 불 법의 극의(極意)를
가슴에 간직하게 되면 저절로 회득(會得)할 것이다. 이 사 후의 생명이 어떠한 연에 닿아 우
리들의 눈에 비치는 생활활동이 되어 나타난다. 마치 잠을 깨어났을 때에, 어제의 마음의 활
동상태를 지금도 또한 그 뒤를 따라서 활동하듯이 새로운 생명은 과거의 생명의 업인(業因)
을 그대로 받아서 이 세상의 과보(果報)로서 계속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자고 나면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자는 것과 같이 살다가는 죽고, 죽었다가는 살
아나며, 영구한 생명을 보지(保持)하고 있다. 그 생(生)과 생(生)의 사이의 시간은 사람에 따
라 각각 다르므로, 이 세상에서 부부(夫婦)부자(父子)라는 것도 영구히 부부와 부자(父子)일
수는 없다.
단 청정하고 진실한 南無妙法蓮華經를 신봉(信奉)하는, 즉 日蓮대성인의 一二七九년 一월 十
二일의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大御本尊)을 믿는 자(者)만이 영구한 부자이고, 동지
라는 대공덕(大功德)을 향수(享受)하고 있는 것이다.
▼ 생명의 불가사의
일본의 신도(神道)가 초국가주의(超國家主義), 전체주의(全體主義)에 이용당하여 마침내는
무모한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을 때에, 나는 은사 마키구치 쓰
네사부로(牧口常三郞)선생님 및 친애하는 동지와 함께 당시의 종문정책(宗門政策)이 매우
잘못되었음을 역설(力說)하였다.
즉 일본국민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조한 것의 비논리적(非論理的), 비도덕적(非道德
的)인 이유를 설했던 것이지만, 그 때문에 一九四三년 여름 탄압을 받았고 그 후 二년의 구
치소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차가운 구치소에 죄도 없이 붙들려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동안 깊은 사색(思索)은 사
색을 불러 마침내는 인생의 근본문제이며, 더구나 극히 난해(難解)한 문제인 "생명의 본질"
에 부딪쳤던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영구히 계속하는 것일까"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수수께끼이고 더구나
고래(古來)의 성인(聖人), 현인(賢人)이라고 칭송되는 사람들은 각인각색으로 이 문제의 해
결을 설해 왔다.
불결한 구치소에는 이(蟲)가 곧잘 번식한다. 따뜻한 봄볕을 쬐어 이들은 슬슬 놀러 기어 나
왔다. 나는 두 마리의 이를 판자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더니 그것들은 열심히 수족(手足)을
내저었다. 먼저 한 마리를 눌러 죽였지만, 다른 한 마리는 그런 일에 아랑곳없이 움직이고
있다. 눌러 죽인 이의 생명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영구히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
일까.
또 벚꽃나무가 있다. 그 가지를 꺾어 꽃병에 꽂아 두었더니, 이윽고 봉우리는 꽃이 피고 푸
른 잎도 핀다. 이 벚나무 가지의 생명과 본래 벚나무의 생명과는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생명이란 더욱더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 옛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딸이 죽어서 번민하며 괴로움에 빠진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 때, 자신은 딸이 죽자 그렇게까지 괴로워했는데, 만약 아내가 죽는다면(그 아내도 죽어
자신을 슬프게 하였지만) 만약 아버지가 죽는다면 (그 아버지도 죽어서 나는 많이 울었지
만)라고 생각했을 때에 몸을 떨며 그리고 자기자신이 죽음에 직면한다면 어떨까 라고 생각
하면 현기증이 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신앙에 들어가기도 하고, 또는 아미타경(阿彌陀經)에 의하거나 하여
끊임없이 길을 구해 왔지만, 아무래도 생명의 문제에 관해 마음의 근저에서 납득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다. 그 번민을 또한 독방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과학, 수학의 연구
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론적(理論的)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로지 법화경과 日蓮대성인의 어서를 배독했다. 그리고 법화경의
불가사의한 구절을 만나 이것을 몸으로 독파하고 싶다고 염원하여, 대성인의 가르침대로 제
목을 불러갔다. 제목수가 거의 이백만번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매우 불가사의한 일에 부딪쳐
일찍이 생각할 수 없었던 경지(境地)가 눈앞에 전개되었다. 기쁨에 떨면서 혼자 독방에 서서
삼세시방(三世十方) 의 불(佛), 보살(菩薩), 일체 중생을 향하여 이렇게 외친 것이다.
늦기를 五년으로써 미혹하지 않고, 앞서기를 五년으로써 천명(天命)을 알았노라.
이러한 체험에서 나는 지금 법화경의 생명관에 입각하여 생명의 본질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삼세(三世)의 생명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에 가로되, "모든 선남자(善男子)여, 여래(如來)는 모든 중생의, 소법
(小法)을 원하는 덕박구중(德薄垢重)의 자를 보고서는 이 사람을 위하여 나는 젊어서 출가
(出家)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득했다고 설하도다. 그런데 나는 실로 성불(成佛)한 이래
구원(久遠)함이 이와 같도다"
자아게(自我偈)에 가로되 "나는 부처를 득한 이래 거치는 바의 모든 겁수 무량백천만억(無
量百千萬億) 나유타 아승기(阿僧祈)이니라"(同쪽)
이 경문은 법화경의 극히 일부이지만 대개 석존일대(一代)의 불교는 생명의 전세(前世), 현
세(現世) 및 내세(來世)의, 소위 삼세(三世)의 생명을 대전제(大前提)로 설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삼세의 생명관을 빼버리고, 생명은 현세만 있다고 하게 되면 불교철학은
완전히 그 근거(根據)를 잃어버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각 경전(經典)에는 생
명의 원근(遠近), 광협(廣挾)에 따라 그 경전의 고하천심(高下淺深)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日蓮대성인에 있어서도 삼세의 생명관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단
석존보다도 대성인은 생명의 존재를 보다 깊게, 보다 본원적(本源的)으로 생각하시고 있는
것이다. 중략(中略)
▼ 영원한 생명(生命)
인간의 생명은 삼세에 걸친다고 하지만 그 길이는 어떠한지 이것이야말로 또한 불법의 근간
(根幹)이기 때문에 여기에 경문(經文)을 인용한다.
법화경여래수량품(法華經如來壽量品)에 가로되
"그런데 선남자(善男子)여, 나는 실로 성불(成佛)한 이래 무량무변백천만억나유타겁(無量無
邊百千萬億那由陀劫)이니라. (중략)이 이래 나는 항상 이 사바세계에 있어서 설법교화(說法
敎化)하도다"
이 경문은 석존의 수많은 경문중(經文中)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깨달음의 가장 근본이다.
그 대의(大意)를 말한다면 "너희들은 모두 내가 이 세상에서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
지만, 실은 자신이 부처가 된 것은 지금부터 오백진점겁(五百塵点劫)이라는 헤아릴 수도 없
을 만큼의 옛날에 성불하여, 항상 이 사바세계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의미이
며, 자신의 생명은 현세만의 것이 아니고 또한 깨달음도 현세만의 것이 아니라 영구한 옛날
부터의 존재인 것이다 라고 갈파(喝破)하고 있는 것이다.(중략)
日蓮대성인에게 있어서는 석존이 부처의 경계(境界)에서 구원의 생명을 관(觀)한데 대하여,
대성인은 명자즉(名字卽)의 범부위(凡夫位)에 있어서 본유(本有)의 생명, 상주(常住)의 부처
를 설하시고 있다. 즉 범부인 우리들의 모습 자체가 무시본유(無始本有)의 모습이다. 순간은
영원을 내포하고 영원은 순간의 연속이다. 구원이란 작용하지않고, 꾸미지도 않고, 본래 그
대로라고 설해져 있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부처를 중심으로 전개하는 석존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은 본적
(本迹)이 함께 이상(理上)의 법상(法相)이며, 범부(凡夫)의 당체본유(當體本有) 그대로에 있
어서 몸에 지닌, 대성인의 직달정관(直達正觀), 사행(事行)의 일념삼천(一念三千)이야말로 가
장 생명의 실체를 보다 본원적으로 설해 밝히시고 있는 것이라고 배견된다.
사적으로 회통(會通)을 가하여 본문(本文)을 그르치게 하는 두려움이 있기는 하나 그 일단
(一端)을 말해 보겠다.
생명이란 우주와 더불어 존재하고, 우주보다 앞서지도 않았으며, 나중에 우발적으로 혹은 누
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생긴 것도 아니다. 우주자체가 이미 생명 그 자체이며, 지구만의 전유
물(專有物)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들은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성인의 자비를 받아 직달정관사행(直達正觀事行)의 일념
삼천의 대어본존(大御本尊)에게 귀의하여 받들어 "묘(妙)"인 생명의 실체파악에 면려하고 있
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 생명의 연속
생명은 영구(永久)하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바 이지만, 이 사고법
(思考法)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어떤 사람은 관념적으로 다만 〃영원〃하다고 주장하여, 어
렴풋이 믿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이런 관념적인 영원은 우리들이 취하지 않는 바이다.
또한 자손(子孫)에게 생명이 전달되고 그 자손에 전달되는 생명 속에 자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가 있으나 이렇다면 영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만약 손자가 단멸(斷滅)하게
된다면 자신이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지구가 멸망한다면 없어지는 그러한 생명으로는 영원
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자손과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실제로 지금 살아있는 아들 속
에 같이 활동하고 있는 자신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되며, 매우 불합리(不合理)하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사후(死後)의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자손의 몸을 자신의 묘
소와 같이 생각하는 천박한 생명관이며, 영구한 생명을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저 유명한 다카야마 초규(高山樗牛)선생은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한다. 그 위대한 일은 후세
에도 남는다. 그 후세에 남은 위대한 일에 자신은 살아 있다"라고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초규선생은 위대한 문학자(文學者)이니 만큼 나는 매우 고심한 것이다.
만약 선생의 말과 같다면 평범한 우리들이나 개나 고양이는 영구한 생명이라 할 수 없게된
다. 따라서 이 경우의 영원한 생명에는 보편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오랫동안 정말인가, 거짓
말인가하고 괴로워한 결과, 그는 위대한 문학자이지만, 사후의 생명에 관해서는 매우 천박한
사고법이라고 하는 결론에 달하였다.
한 약간 이론적이지만, 사실과는 상위(相違)하고 있는 생명론으로, 생물에게는 뭔가 영혼이
라는 그러한 것이 있어 그것이 영구히 전해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이것은 언뜻 들으면 진실과 같이 생각되므로 상당한 학자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그러한 것도 불교철학의 대상으로서는 전혀 무가치한 것이다. 석존은 열반경 속에서
철저하게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즉 이 사고법은 사견(邪見)이고, 바른 것이 아닌 것으로 되
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모양으로 하여 모든 것의 생명이 연속하는 것일까.
사후의 문제는 불교철학에서도 상당히 최고에 속하는 것이므로 그 소질이 없는 사람에 대해
서는 잘못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이것을 생략하기로 하고 더없이 상식론적(常識論的)으
로 다루고자 하니 그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수량품(壽量品)의 자아게 에서는 "방편현열반(方便現涅槃)"이라고 있어, 죽음을 하나의 방편
이라고 설해져 있다. 예를 들어보면, 잔다고 하는 것은, 일어나서 활동한다고 하는 인간본래
의 목적에서 보면 단순한 방편이다. 인간이 활동한다고 하는 면에서 보면 잘 필요는 없는
것이지만 자지 않으면 피로는 풀 수 없고, 또한 발랄한 활동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도 노인이 되거나 병이 들어 국부(局部)가 파산되거나 한 경우에 있어서 아
무래도 죽음이라는 방편에서 젊음을 회복하는 수밖에 없다.
불법의 극리는 일념삼천이지만, 사후의 생명도 또한 일념삼천과의 관련에서 해결되고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개목초(開目抄)"에 "일념삼천은 십계호구(十界互具)로 부터
시작되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관심의 본존초(觀心本尊抄)"에서는 십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다.
"자주 타면(他面)을 보건대, 어느 때는 기뻐하고 어느 때는 노(努)하며, 어느 때는 평온(平
穩)하고 어느 때는 탐(貪)을 나타내며 어느 때는 어리석음을 나타내고 어느 때는 첨곡(諂曲)
이니라. 노함은 지옥(地獄), 탐함은 아귀(餓 鬼), 어리석음은 축생(畜生), 첨곡함은 수라(修
羅), 기뻐함을 천(天), 평온함은 인(人)이니라. 세간(世間)의 무상(無常)은 눈앞에 있으니 어
찌 인계에 이승계(二乘界)가 없으리오, 무고(無顧)의 악인(惡人)도 역시 처자(妻子)를 자애
(慈 愛)하니 보살계(菩薩界)의 일분(一分)이니라. 단 불계(佛界)만은 나타내기 어렵도다" 운
운(어서二四一쪽)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마음의 상태를 곰곰히 사색하게 되면 순간순간에, 일념일념
(一念一念)이 이렇게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일어났다가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 탐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노함이다. 그리고 두개의 생각이 일시에 일어나는 일은 결코 있을수 없는 것
이다.
여기에서 조금 설명을 더하고 싶은 것은 본존초(本尊抄)에서 "불계(佛 界)만은 나타내기 어
렵도다"라고 있지만, 그 불계를 나타내는 연(緣)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日蓮대성인의 불법
의 극리는 사행(事行)의 일념삼천이며, 실천의 형태는 삼대비법(三大秘法)에 있다. 그러므로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본존님을 신앙하는 것만이 그 연(緣)이 되어 즉신성불(卽身成佛)을 할
수 있는 것이다.(중략)
우리들의 마음의 작용을 보건대 기쁘다고 해도 그 기쁨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 기쁨
은 영혼(靈魂)과 같은 것이, 어딘가에 가 버린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어딘가에 녹아 들어가,
어디를 찾아 보아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몇 시간이나 며칠 후가 되면 또한 같은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또한 어떤 일에 의
해 슬퍼한다고 하자. 몇 시간이나 며칠인가 지나서, 그것을 생각해 내어 또한 같은 슬픔을
새롭게 했다고 하지만, 앞의 슬픔과 뒤의 슬픔과 훌륭한 연속이며 그 중간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같은 그러한 현상이 우리들의 일상의 수면의 경우에도 있다. 자고 있는 동안에 마음은 어디
에도 없다. 그런데 잠을 깨자마자 마음은 활동한다. 수면을 취한 경우에는 마음이 없고, 깨
어 있는 경우에는 마음이 있다. 있는 것이 진짜인가, 없는 것이 진짜인가, 있다고 하면 없고,
없다고 하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유무(有無)를 논(論)할 수 없다고 하는 사고법을, 이것을 공관(空觀)이라고도 묘
(妙)라고도 하는 것이다. 이 소우주(小宇宙)인 우리들의 육체에서 마음이라든지, 마음의 작
용이라든지 하는 것을 사색하여, 이것을 불법철학의 가르침을 받아 진실한 생명의 연속인
유무(有無)를 결론짓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우주는 즉 생명이므로 우리들이 죽는다고 하자. 죽은 생명은 마치
슬픔과 슬픔과의 사이에 아무 것도 없었듯이, 기쁨과 기쁨의 사이에, 기쁨이 어디에도 없었
듯이, 자고있는 동안 그 마음이 어디에도 없듯이, 사후의 생명은 우주의 대 생명으로 들어가
어디를 찾아보아도 없는 것이다.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 훨훨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大 自然)속으로 들어갔다
고 해도 결코 안식(安息)하고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자는 것이 안식이라고 단정
해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고 있는 동안 안식하고 있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괴로운 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얕은 잠에 들어가 있는 사람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사후의 대생명(大生命)에 녹아 들어간 모습은 경문에 눈을 뜨고, 불 법의 극의(極意)를
가슴에 간직하게 되면 저절로 회득(會得)할 것이다. 이 사 후의 생명이 어떠한 연에 닿아 우
리들의 눈에 비치는 생활활동이 되어 나타난다. 마치 잠을 깨어났을 때에, 어제의 마음의 활
동상태를 지금도 또한 그 뒤를 따라서 활동하듯이 새로운 생명은 과거의 생명의 업인(業因)
을 그대로 받아서 이 세상의 과보(果報)로서 계속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자고 나면 일어나고, 일어났다가는 자는 것과 같이 살다가는 죽고, 죽었다가는 살
아나며, 영구한 생명을 보지(保持)하고 있다. 그 생(生)과 생(生)의 사이의 시간은 사람에 따
라 각각 다르므로, 이 세상에서 부부(夫婦)부자(父子)라는 것도 영구히 부부와 부자(父子)일
수는 없다.
단 청정하고 진실한 南無妙法蓮華經를 신봉(信奉)하는, 즉 日蓮대성인의 一二七九년 一월 十
二일의 본문계단(本門戒壇)의 대어본존(大御本尊)을 믿는 자(者)만이 영구한 부자이고, 동지
라는 대공덕(大功德)을 향수(享受)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