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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급시험 자료(니치렌 대성인 멸후의 전개와 창가학회)

  • 허정화

  • 2011-02-28

  • 6,263

니치렌 대성인 멸후의 전개와 창가학회

다음은 대성인의 입멸 후를 살펴보면서 대성인의 불법을 계승한 닛코 문류 (日興門流)의 성립 과정과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닛코 상인


① 대성인의 문하가 되다
니치렌 대성인에게 일체를 부촉받으신 제2조 닛코 상인은 1246년 3월 8일, 가이 지방 고마 군 오이쇼 가지카자와에서 아버지 오이노기쓰로쿠, 후지유이 씨의 딸인 어머니 묘후쿠의 사이에서 탄생했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읜 닛코 상인은 어머니가 다른 가문으로 재가했기 때문에 가와이에 살던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후지 군에 있는 시주쿠원이라는 천태종 사원에서 수학하시다 1258년에 그 근처에 있는 이와모토의 짓소사(實相寺)에서 일체경을 열람하신 니치렌 대성인과 만나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습니다.

② 대성인에게 상수급사
출가하여 호키보라는 이름을 사용하신 닛코 상인은 1261년 니치렌 대성인이 막부에 의해 이즈의 이토로 유배되셨을 때 이토로 향하는 대성인에게 상수급사(常隨給士: 제자가 항상 스승에게 순종하며 섬기는 것)하셨고, 대성인이 사면되시어 가마쿠라로 돌아오시게 되자 가마쿠라까지 동행하였습니다. 1271년 대성인이 사도에 유죄되셨을때에는 대성인과 함께 사도까지 가서 사도의 땅에서 상수급사하셨습니다.

③ 후지 방면의 홍교
사도 유죄에서 사면된 후 대성인은 미노부 산에 들어가셨는데 미노부를 선택하신 것은 미노부의 지두 하키리사네나가가 닛코 상인에게 절복되어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이 자리를 잡으시자 닛코 상인은 연고가 있는 후지 방면으로 절복을 개시하였습니다. 또 이즈 지방까지도 발걸음을 옮기셨으며 그곳에서 그때 당시 15세였던 니치모쿠 상인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이 * 스루가 지방에서는 이미 닛코 상인의 홍교로 유이 씨, 하키리 씨, 오오이 씨, 아키야마 씨 등이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고 또한 천태종 사원인 시주쿠원과 류센 사의 니치켄, 닛슈, 니치벤, 니치전 등이 제자로 되었습니다.

④ 아쓰하라 법난
시주쿠원, 짓소 사, 류센 사 등의 승려뿐 아니라 농민 등 재가의 사람들도 차례로 입신하였기 때문에 각 사원의 원주대(주지) 등이 대성인의 문하가 된 승려를 추방하는 등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1279년에는 아쓰하라의 농민 신도 20명이 사실 무근의 죄를 뒤집어쓰고 체포 * 연행되어 그중 3명이 순교하는 사건(아쓰하라 법난)이 일어났습니다.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지도를 받고 사태에 대처하시며 후지 방면 문하의 중심자로서 박해와 싸우셨습니다.

⑤ 대성인에게 부촉을 받다
대성인을 오랜 시간 상수급사하신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법의(法義)를 계승하셨습니다.
대성인이 미노부에서 하신 법화경 강의를 <어의구전>으로 남기셨을 뿐 아니라 본존님에 관한 '어본존 칠개 상승(相承)' '세번의 상승'을 전수하셨으며 또 대성인에게서 <백육개초> <본인묘초> 등을 받으셨습니다. 상승이란 스승과 제자가 상대하여 법문을 수여하고 승계하는 것으로 부촉, 상전과 같은 뜻입니다. 대성인은 입멸하실 즈음, 닛코 상인에게 홍법 전체를 부촉하는 <미노부상승서(니치렌 일기 홍법 부촉서)>, 미노부 구온 사의 별당(주지)을 계승시키는 <이케가미 상승서(미노부 부촉서)>를 내리셨습니다.

⑥ 구온 사 별당을 계승
대성인이 입멸하시자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유골을 모시고 미노부로 돌아와 일종의 총관수, 또 구온 사의 별당이 되셨습니다.
닛코 상인은 미노부에 대성인의 묘소를 만들어 유골을 모시고 100일기의 법요를 집행한 후 육노승을 포함한 중심 제자 18명으로 하여금 날마다 순번을 정하여 보은사덕(報恩謝德)을 위한 묘소 수호에 임하셨습니다.
그러나 닛코 상인을 제외한 오노승과 그 제자들은 묘소 순번을 지키지 않고 게을리했을 뿐 아니라 닛코 상인을 버리고 미노부 산에서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간 오노승은 권력의 탄압을 두려워한 나머지 천태사문(天台沙門: 천태종의 승려)이라고 칭하며 몸도 마음도 타락해 갔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1285년, 오노승 가운데 한 사람인 민부 니코(民部日向)가 미노부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를 기뻐하신 닛코 상인은 니코를 학두(學頭: 별당 다음의 직책)로 임명하였습니다.
한편 닛코 상인이 입신시켰던 지두 하키리사네나가는 닛코 상인이 구온 사의 제2조로 되시자 처음에는 대성인의 제자라고 하면서 기뻐하였습니다만 니코와 알게 되면서 엄격한 닛코 상인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는데 가마쿠라 방면의 느슨한 풍조에 물든 니코를 따라 석가여래상을 만들고 신사를 참예하였을 뿐 아니라 염불종 사원에 탑까지 공양하는 등 염불 도량 조립이라는 방법<사개의 방법>을 범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키리사네나가는 닛코 상인이 누차 훈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나는 민부아지리<니코>의 제자다"라는 폭언을 내뱉기까지 되었던 것입니다.

⑦ 미노부 이산(離山)과 다이세키 사의 창건
이와 같이 미노부 산은 니코의 사의와 하키리사네가의 위배로 결국에는 방법의 땅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닛코 상인은 이 일을 깊이 고민하셨지만 대성인의 「지두의 불법(不法)의 때에는 나도 머물지 않으며」라는 유언에 비추어 대성인의 정의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방법의 땅이 된 미노부 산을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되었습니다.
1289년 봄, 대어본존과 대성인의 유골 등 모든 중보(重寶)를 호지(護持: 수호하고 수지함)하고 제자들과 함께 미노부를 떠나신 닛코 상인은 우에노 고을의 지두이자 닛코 상인의 제자인 난조도키미쓰의 요청을 받아들여 난조가로 옮기셨습니다.
도키미쓰는 닛코 상인에게 오이시가하라를 공양하였는데 닛코 상인은 그 땅에 문하의 협력을 얻어 1290년 10월 12일에 아시세기 사(大石寺)의 기원이 된 12간 사면의 대방을 건립하시게 되었습니다.
1298년 닛코 상인은 난조도키미쓰와 우에노 고을의 동쪽에 위치한 오모스 고을의 지두 이사카와 씨 그리고 후지 지방의 문하 등의 협력으로 담소(談所: 학문소)를 열어 손수 <입정안국론> 등 주요 어서를 강의하시는 등 본격적인 제자 양성에 몰두하셨습니다.
또 문하들에 의한 홍교는 규슈, 시코쿠, 산인, 긴키, 도호쿠의 각 지역까지 퍼져 갔습니다. 이와 같이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어서를 수집하고 법의를 선양하였으며 제자의 육성과 홍교의 추진 그리고 위정자에 대한 간효 등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셨습니다.

⑧ 니치모쿠 상인에 대한 부촉과 광포의 유명(遺命)
닛코 상인은 1332년 11월. 니치모쿠 상인(日目上人:1260~1333)에게 양장(讓狀: 상전<相傳>을 기록한 서장<書狀>-닛코적조조사)을 주며, 대어본존을 수여하고 부법하셨습니다.
그 양장에는 「닛코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홍안 2년의 대어본존을 니치모쿠에게 상전한다… 다이세키 사는 어당(御堂)이며 묘소(墓所)이니 니치모쿠 이를 관령(管領: 도맡아 다스림)하여 수리(修理)를 더하고 근행을 하여 광선유포(廣宣流布)할지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333년 1월 「아직 광선유포가 되지 않은 동안은, 신명(身命)을 버리고 수력홍통(隨力弘通: 자신의 재능과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타행에 진력함)을 해야 할 것」등 26개조에 걸친 <닛코유계치문>을 저술하시고 2월 7일 88세로 천화(遷化)하셨습니다.



2. 닛코 문류



① 닛코 상인과 오노승
니치렌 대성인에게서 부촉을 받은 닛코 상인은,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님으로 받들고 대성인이 도현하신 대만다라를 본존으로 배알하는 신앙과 교의를 전하였습니다.
닛코 상인을 원조로 하는 문류를 닛코 문류 또는 후지 문류라고 합니다. 일련정종이라고 호칭한 것은 1912년부터 입니다.
대성인이 '출세의 본회'로서 1279년 10월 12일에 도현하신 '일염부제총여 대어본존'도 닛코 상인이 계승하여 문류의 중심인 후지 다이세키 사에 호지하셨습니다.
이상 설명한 것을 삼보론으로 말하면, 후지 문류에 있어 삼보는 니치렌 대성인이 불보(佛寶), 본존님이 법보(法寶), 불법을 올바르게 후세에 전한 닛코 상인이 승보(僧寶)가 됩니다.
이에 비해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님으로 배알하지 않는 오노승들은 막부의 박해를 두려워하여 천태사문이라고 칭하며 니치렌 대성인의 가르침에 위배하는 가르침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닛코 상인은 「후지일적문도존지」의 사(事)」「오인소파초」등에서 오노승과 그 문류의 그릇됨을 파절하셨습니다.
닛코 상인과 오노승의 신앙 * 교의의 상위<이것을 '오일상대(五一相對)'라고 합니다>에 대하여 닛코 상인은 「오인소파초」(어서 1610쪽)에서 대략 다음과 같은 점을 꼽으셨습니다.
(1) 닛코 상인은 니치렌 대성인의 제자라고 했지만 오노승은 스스로 '천태사문'이라고 이름했다.
(2) 닛코 상인은 대성인께서 도현하신 만다라를 본존으로 했지만 오노승은 석가불상을 본존으로 하여 만다라 본존님을 경시했다.
(3)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어서를 존중했지만 오노승은 어서를 경시하였고 가나 문자로 적힌 어서를 버리고 파기했다.
(4) 닛코 상인은 신사 참예를 금지하였지만 오노승은 신사 참예를 용인했다.
(5) 닛코 상인은 상법 시대의 수행인 법화경의 전문 독송<일부 독송이라고 한다>과 사경(寫經: 경전의 복사)을 금지하였지만 오노승은 그것을 허용했다.
(6) 닛코 상인은 타종과 나란히 국가 안온을 기원하지 말라고 했지만 오노승은 타종과 나란히 국가 안온을 기도했다.
이와 같이 오노승과 그 문류는,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근본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닛코 상인의 정의를 계승하여 '좌주(座主: 큰 사찰의 주지. 일련정종의 역대 법주)'로서 올바르게 삼보를 호지하고 후세에 전한 분이 니치모쿠 상인입니다.
니치모쿠 상인은 절복 * 홍교에 진력하시면서 동시에 수십 차례에 걸쳐 국주 간효를 실시하셨는데 천황에게 정법을 간하기 위해 교토로 향하는 도중, 1333년 11월에 천화하셨습니다.
니치모쿠 상인 이후 역대 법주는, 삼보를 호지해야하는 좌주에 해당합니다.

② 닛코 문류의 신앙
닛코 상인이 여신 닛코 문류의 신앙은 오노승과 비교하면 저절로 명확하게 됩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본존님 근본 - 닛코 문류에서는 니치렌 대성인이 도현하신 만다라 본존님을 신앙의 근본대경(根本對境: 본존)으로 합니다. 그러나 오노승의 흐름을 받은 문류는 석가불상을 비롯한 잡다한 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2) 광선유포 - 닛코 상인은 <유계치문>에 「아직 광선유포가 되지 않은 동안은, 신명을 버리고 수력홍통을 해야 할 것」(어서 1618쪽)이라고 남기셨듯이 광선유포의 실천을 신앙의 근본 자세로 하였습니다. 그 정신을 닛코 상인 * 니치모쿠 상인이 광선유포 실현을 목표로 막부와 조정에 반복해서 국주 간효를 실시한 것과 닛코 상인이 문하 육성에 몰두하시어 도호쿠에서 규슈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로 문하가 확산되었다는 사실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오노승의 흐름을 타는 문류는 대성인의 정신에 위배하여 천태사문이라고 이름하고 권력에 영합하였던 것입니다.
(3) 니치렌 대성인 직결 - 닛코 상인은 니치렌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님으로 배알하고 대성인을 근본 스승으로 하는 신앙을 세워, 대성인의 정신을 계승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노승이 천태대사의 제자<천태사문>라고 칭한 것과 대비되는 점입니다. 오노승은 말법에서도 석존을 교주로 하였으며 니치렌 대성인을 석존의 가르침을 넓히는 존재로서만 생각하였습니다. 그에 비해 닛코 상인은, 석존은 정법 * 상법 시대의 교주이며 말법의 교주는 니치렌 대성인이라고 하셨습니다.



3. 삼보와 어서


여기서는 닛코 문류의 성립과 함께 명확히 밝혀진 삼보관(三寶觀)을 살펴보겠으며 어서(御書)를 배독하는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1) 삼보
삼보(三寶)란 불교 신도가 존경해야 할 세 가지 보물을 말하는 것으로 불보(佛寶) * 법보(法寶) * 승보(僧寶)를 말합니다.
부처(佛)란 우주 근원의 법을 깨닫고, 일체중생에 대한 주사친의 삼덕을 갖춘 불법의 교주이며, 법(法)이란 그 부처가 설한 교설(敎說), 승(僧)이란 그 법을 전하고 호지하며 넓히는 불제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모두 존중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보'라고 합니다.
이 부처 * 법 * 승의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 불도 수행의 기본이 됩니다.
불교도 시기에 상응하여 여러 가르침이 넓혀졌기 때문에 각각의 가르침에서 다른 내용의 삼보가 세위졌습니다.
예를 들어 정법 시대에 최초로 넓혀진 소승교에서는 소승의 석존을 불보, 소증 경전을 법보, 가섭 * 아난 등을 승보라고 하였습니다.
상법 시대의 천태 불법에서는 법화경의 교주 석존이 불보, 일념삼천의 법이 법보, 관음 * 약왕 등이 적화(迹化)의 보살(또 그 재탄이라고 하는 남악 * 천태 등)을 승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법에서는 이들 삼보에 힘이 없어지게 되므로 말법의 삼보(구원원초의 삼보)에 따라야 합니다.
그 삼보란, 불보는 구원원초 자수용신보신여래인 니치렌 대성인, 법보는 南無妙法蓮華經의 본존님, 승보는 닛코 상인을 가리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니치칸 상인은 <당류행사초>에서 「구원원초의 불보, 연조 니치렌 대성인 (중략) 구원원초의 법보란 본문의 대어본존 (중략) 구원원초의 승보란 개산 상인(開山上人: 사원을 창립한 승여를 말함. 여기서는 닛코 상인)」(<육권초>)이라고 명확하게 교시(敎示)하셨습니다.
이 말법의 삼보에 대하여 대략 설명을 하면 '말법의 불보'는 구원원초 자수용신여래의 재탄인 니치렌 대성인을 말합니다. 대성인은 구극의 대법인 구원원초의 南無妙法蓮華經를 인법일개(人法一箇)의 경애에 소지하신 근원의 부처입니다.
또한 대성인은 갖가지 대난을 견디며 일체중생의 성불을 위해 당신이 깨달으신 묘법을 본존님으로 써 나타내 주셨습니다.「日蓮은 일본국의 제인(諸人)에게 주 * 사 * 부모이니라」(어서 237쪽)라는 말씀처럼 주사친의 삼덕을 갖추신 그 존귀한 대자비의 모습이야말로 말법의 불보임이 틀림없습니다.
'말법의 법보'란 본불님 * 니치렌 대성인이 도현하신 삼대비법(三大秘法)의 본존님을 가리킵니다. 대성인이 도현하신 만다라 본존님은 「日蓮의 혼을 먹물에 물들여 넣어서 썼으니 믿으실지어다」(교오전답서 어서 1124쪽)라는 말씀처럼 일념삼천의 법을 몸으로 나타내신 대성인의 생명을 그대로 나타내신 본존님이며 南無妙法蓮華經를 말법 홍통의 법체로서 현현하신 당체이므로 말법의 법보가 되는 것입니다.
또 '말법의 승보'는 말법의 불보 * 법보를 올바르게 전하고 호지하신 닛코 상인입니다. 이를테면 대성인의 수계자인 육노승 중에 나머지 오노승이 대성인을 천태 불법의 흐름 안에 집어넣고 석존의 불상을 본존으로 한 것에 비해, 닛코 상인만이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님으로 배견하고 대성인이 도현하신 만다라를 본존으로 하셨습니다.
닛코 상인에 의해 처음으로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이 올바르게 전해졌으므로 닛코 상인을 말법의 승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는 삼보입니다.
또 승보는 폭넓게 논할 수 있습니다. 즉 존경과 숭앙의 대상이 되는 삼보를 올바르게 전하고 호지하고 넓히는 화합승 그 자체(승속의 전체)도 넓은 의미에서 승보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창가학회(SGI)가 승보에 해당합니다. 물론 현재 일련정종 종문과 다른 문류처럼 대성인의 정신에 위배하고 있는 존재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승보가 될 수 없습니다.

(2) 어서
닛코 상인과 오노승의 커다란 차이점이라고 해야 할 어서에 대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어서'란 니치렌 대성인이 직접 집필하신 저작을 말하며 우리들 대성인 문하가 심간에 새겨 교의의 근본으로 해야 할 성전(聖典)입니다.
어서를 크게 나눈다면 법문에 대해 논하는 논문(<관심의 본존초>와 <개목초> 등)과 제자단나에게 주신 편지(이것을 소식문이라고 합니다. <시조깅고전답서> <우에노전답서> 등), 요문초록(경문이나 <마하지관> 등의 요문을 서사한 것). 계도(繼圖: 도표로 불법의 흐름을 밝힘. <일대오시계도> 등) 등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또 한문체로 된 것과 가나 문자를 섞은 것이 있습니다.
한문체로 쓰신 것은 <관심의 본존초>나 <입정안국론> 등 논문 형식의 어서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소식문 중에서도 도키조닌이나 소야교신 등 당시 무사 중에서도 상당한 지식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신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외의 여러 어서는 가나를 섞은 평이한 문장으로 쓰셨습니다.
이것은 대성인 재세 당시의 민중 대다수가 문자를 배울 기회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일부 무사나 지식 계층을 제외하면 난해한 한문체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대성인은 난해한 한문체를 이해할 수 없는 민중을 위해 알기 쉽게 가나 문자를 섞은 문자으로 가르침을 설하시고 여러 가지 비유나 고사를 이용하여 법문의 내용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 멸후, 닛코 상인을 제외한 오노승<닛쇼, 니치로, 니코, 닛초, 니치지>은 대성인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소중한 어서를 소홀히 하였습니다.
<후지일적문존지의 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습니다.
「一. 성인(聖人) 어서(御書)의 일 부기(附記) 십일개조 그 5인 일동(一同)의 의(義)에 가로되, 성인이 술작하신 어서석(御書釋)이란 없는 것이며, 설령 약간 있다고 할지라도, 혹은 재가인(在家人)을 위해 가나(假字)로써 불법의 인연을 대충 나타내고, 혹은 속남속녀(俗男俗女) 로서 일호(一毫)의 공양을 바친 소식(消息)의 답서(答書)에 시주분(施主分)을 써서 우치(愚癡)한 자를 인섭(引攝)하셨느니라. 그런데 닛코는 성인의 어서라고 일컬어 이를 담(談)하고 이를 읽고 있는데 이는 선사(先師)의 치욕(恥辱)을 드러냄이라 운운(云云). 고로 제방(諸方)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어필(御筆)을 혹은 재생(再生)으로 하고, 혹은 불태웠느니라」(어서 1604쪽)
오노승들은 가나 문자가 섞인 어서를 대성인의 수치라고 하며 어서를 재생지로 사용하거나 불태워 버렸습니다. 이것은 오노승이 대성인을 말법의 본불님으로 배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닛코 상인은 대성인의 저작을 모두 '어서'라고 부르며 존중하여 산재되어 있는 어서를 수집하고 후세에 남기기 위해 그 서사(書寫)에 몰두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백 편이나 되는 어서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선택하였으며 (십대부=술작순서로 ①<창법화제목초> ②<입정안국론> ③<개목초> ④<관심의 본존초> ⑤<법화취요초> ⑥<선시초> ⑦<보은초> ⑧<사신오품초> ⑨<시모야마어소식> ⑩<본존문답초>), 또 어서 강의를 통해 대성인의 본의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 계속 노력하셨습니다.
그리고 <닛코유계치문>에서는 「당문류(當門流)에 있어서는 어서(御書)를 심간(心肝)에 새기어」(어서 1618쪽)라며 천태 교학이 아닌, 어서를 근본으로 하라고 교시하셨습니다.
이 닛코 상인의 정신을 이어서 창가학회에서는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의 발원(發願)으로 1952년 4월 28일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을 발간했습니다.
호리니치코 상인의 연구 성과에 기인해서 상전서까지 포함한 대성인의 어서를 집대성한 일은 750년 동안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쾌거이며 어서를 신앙의 근본으로 하는 창가학회의 신심을 나타낸 대사업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일련정종 종문은 전쟁 중, 국가 권력의 탄압을 두려워하여 천황 지상주의에 장애가 되는 어서의 글월을 삭제하는, 대성인 문하로서 해서는 안 될 과오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1941년 8월에는 어서의 간행을 금지한다고 지시를 내리고, 나아가 같은 해 9월에는 종무원 교학부장 이름으로 대성인이 본불님을 나타내는 「日蓮은 일염부제 제일의 성인(聖人)이로다」(어서 974쪽)를 비롯한 14군데에 이르는 어서 글월을 삭제한다고 공표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국가 신도와 결탁하고 있던 군부 권력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어서 근본을 관철하는 창가학회와 어서를 계속해서 경시해 온 종문의 상위점은 명확한 것입니다.



4. 닛코 문류의 변천


니치모쿠 상인의 멸후, 다이세키 사에서는 일부 토지를 둘러싸고 수십 년 동안 내부 투쟁이 발생하여 후지 문류는 정체하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서 무로마티 시대에 나타난 제9세 니치우 상인(日有上人: 1402~1482년)은 당탑(堂塔)을 되찾기위해 힘썼을 뿐만 아니라 전국에 포교의 발걸음을 옮기며 교의와 화의(化儀)의 정비를 도모하였습니다. 니치우 상인의 교시는 <화의초(化儀抄)>로 남아 있습니다.
니치우 상인 이후는 소년 법주<유아 관수>가 이어졌으며 또 약 100년에 걸쳐 교토의 요부우 사(要法寺) 출신의 승려를 법주로 하는 등 다이세키 사 법주의 계승은 가까스로 유지되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에도 시대 중기의 제26세 니치칸 상인(1665~1726년)은 가람(伽藍)의 건립에 힘쓰시면서 주요 어서와 문단과 <육권초>를 집필, 미노부파 등 다른 문류의 그릇됨을 파절하여 니치렌 대성인 * 닛코 상인 이래 후지 문류로 전해 내려온 교의를 정리 * 체계화하는 데 커다란 업적을 남겼습니다.
닛코 문류는 니치우 상인, 니치칸 상인의 출현으로 기본적으로는 대성인의 불법을 계승하는 닛코 상인의 정신을 전해 왔습니다만, 긴 역사 속에서 대서인과 닛코 상인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교의상의 변질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에도 시대의 단가 제도(檀家制度) 아래서 형식화, 권위주의화가 진전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승려가 스승, 재가 신도는 제자'라는 소위 '승속사제의(僧俗師弟義)'입니다. 즉 승려가 위, 신도가 아래라는 그릇된 승속관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신도는 무엇이가 고민이 있으면 스스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승려에게 기도를 의뢰하는 '기대는 신앙'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또 역대 법주를 절대시하는 '법주 신앙'을 주장하거나 혹은 장례식 등의 의례를 중시하는 것도 변질된 측면입니다.
내부적으로도 단가 제도와 장례식 등의 의식에 의존하는 기성 불교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대성인, 닛코 상인의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 종문은 결국 부패와 내부 항쟁으로 일관하게 된 것입니다.
창가학회가 탄생한 1930년경에는 대성인 * 닛코 상인 이래 정통 불법의 등불은 거의 꺼져 버린 듯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종문에는 닛코 문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광선유포의 신심'이 없었습니다. 그 광선유포의 신심을 소생시킨 것이 학회인 것입니다.



5. 창가학회의 출현과 현대


니치렌 대성인 불법이 종문의 부폐와 변질로 멸해가고 있던 1930년 11월 18일, 창가학회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과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전쟁 전에는 '창가교육학회'라고 했습니다>.
에도 시대 이래, 단가 제도와 장례식 등의 의식에 의존해 왔던 일련정종 종문은 대성인의 불법을 홍통하겠다는 의욕과 신심을 상실하였을 뿐 아니라 불법이 인생의 행복과 사회의 평화를 가져오는 법리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또 종문은 법주와 승려의 권위를 주장하며 재가 신도를 차별하였을 뿐 아니라 니치렌 대성인에게 직결하는 신심에는 서지도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대성인 직결의 신심에 입각한 창가학회는 불법을 인생과 사회에 불가결한 것으로 자리 매김하여 불법 홍통의 실천을 해 갔습니다. 그리고 학회는 처음부터 말사 승려들이 하는 지도에 복종하는 '강(講)'이 아니라 학회 독자의 회(會)를 운영, 회원의 신심을 지도해 갔던 것입니다.
창가학회가 출현하기까지 대성인의 불법은 간신히 호지되어 왔습니다만 닛코 상인 * 니치모쿠 상인 시대에 전국으로 홍교한 것을 제외하고 세계는 고사하고 일본 국내에서도 거의 넓혀진 일이 없었습니다. 학회의 출현으로 대성인 불법은 멸망과 변질의 위기에서 벗어나 전 인류 구제라는 본래의 힘을 나타내 세계에까지 넓혀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창가학회가 광선유포의 사명을 짊어지고 출현한 불의불칙(佛意佛勅)의 교단이라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찍이 제65세 니치준 상인(日淳上人)은 1952년을 경계로 그 이전을 종문에 의한 '호지(護持)의 시대', 이후를 창가학회에 의한 '유통광포(流通廣布)의 시대'라고 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개종(開宗) 700년을 전기(轉期)로 해서 일대 유포에 들어갔다는 것은 정법 유포상에 깊은 약속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느낍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도 창가학회의 출현에 의해 일어난 불연(佛緣)은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니치준 상인 전집>)
학회의 출현으로 '호지의 시대'는 끝나고, 불법을 짊어질 주체자가 학회로 옮겨져 학회가 대성인의 불법을 유포하는 시대로 된 것입니다.
실질적인 광포의 주체자로서 일어선 창가학회는 해외에까지 널리 홍교하여 세계 광포의 기반을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종문의 흥륭이라는 면에서도 350개소 이상의 사원을 건립하여 종문에 기진(寄進)하는 등 종문 외호에도 힘써 왔습니다. 그러나 기성 불교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종문의 승려 중심주의의 권위적 체질 때문에 오히려 학회를 부당하게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이하 계속>

1977년 전후부터 1979년까지 종문과 학회 사이에 마찰이 생겼는데 그때는 학회가 승속 화합을 위해 사태 수습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1990년. 법주 닛켄(日顯)은 학회를 잘라 버리고 회원 신도만 종문에 예속시킨다는 '창가학회 분리 작전'이라는 흉계를 꾸며 같은 해 12월 돌연 위조 테이프를 근거로 '질문' 문서를 학회로 보내 학회를 일방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게다가 종규(宗規)를 변경, 이케다 회장을 비롯한 학회 간부를 총강두 * 대강두에서 파면하겠노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해 온 것입니다. 이 흉계의 내면에는 위에 있는 승려가 아래에 있는 재가 신도를 지도해야 마땅하다는 승속차별주의, 승려중심주의의 차별 의식이 있었습니다.
학회는 이러한 종문의 부당한 비판에 대해서 명확하게 반론을 제기하였고 서로 대화로 해결하기를 바란다는 취지에서 "(ㄱ) 민주 시대에 즉응하여 세계로 열린 종문이 되기 바란다. (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본래 정신을 본받아 권위주의를 시정하고 신도를 멸시하는 행위를 고치기 바란다. (ㄷ) 승려의 타락을 훈계하고 소욕지족의 성승(聖僧)이라는 종풍(宗風)을 확립하기 바란다"는 3항목을 종문에 요망했습니다.
그러나 종문은 대화를 거부한 채 1991년 7월에는 학회에서 실시하는 월례등산회를 일방적으로 폐지. 학회원의 등산을 사실상 정지시켰으며 게다가 같은 해 11월에는 학회를 아예 파문해 버리는 폭거를 저지른 것입니다.
닛켄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법주를 절대시하는 '법주본불론(法主本佛論)'이라는 사의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닛코유계치문>에 「때의 관수(貫首)라 할지라도 불법에 상위(相違)하여 기의(己義)을 세우면 이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것」(어서 1618쪾)이라고 있듯이 '법주 절대' 따위의 교의는 니치렌 대성인에게도 닛코 상인에게도 없는, 불법에서 완전히 일탈한 사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종문은 "승려에 의한 장례식이 성불에 불가결하다"는 등 자기 멋대로 교의를 날조하여 신도를 붙잡아 두려고 하였습니다.
대성인, 닛코 상인의 가르침에 위배된 교의를 세우는 것은 대성인 불법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종문은 닛켄에 의한 학회 파문이라는 폭거와 함께 대성인의 교의에서 완전히 일탈한 사교(邪敎)로 변했습니다.
광선유포 파괴를 기도한 닛켄의 소행은 실로 삼류의 강적 중에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의 정체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학회는 종문에 의한 '파문'을 계기로 승려가 필요없는 '우인장(友人葬)'을 시작하는 등 대성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창가 르네상스'를 추진하였습니다. 1993년, 학회에서는 니치칸 상인이 서사하신 본존님을 어형목(御形木: 목판) 본존님으로 하여 전 세계 회원에게 수여하기로 결정. 종문과 완전히 결별하여 대성인에게 직결하는 광포의 교단으로서 세계 종교를 향해 비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학회는 해마다 전 세계에서 융성해지는 데 비해 종문은 쇠망의 외길을 걸어가고 있어, 불법의 정사(正邪)가 사실로써 명백해지고 있습니다. 2003년 5월 현재, SGI 동지가 활약하는 무대는 186개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민중이 지탱하는 창가학회(SGI)로 인해 대성인 불법의 공덕이 전 인류에게 이르는 때가 드디어 온 것입니다.
- 교학의 기초, 145-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