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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호 좌담회어서 - 법련 내용과 동일
관리자
2012-01-26
9,203
2012 2월 반좌담회 어서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
자, 생명을 단련하는 나날을
밝고 명랑하게!
배경과 대의
이 어서는 진필이 존재하지 않아서 집필 연대나 누구에게 보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1255년에 도키조닌에게 보내셨다고 전해집니다. 제목인 ‘일생성불(一生成佛)’은 범부가 일생 동안에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의의를 법리(法理)와 실천의 두가지 측면에서 밝히셨습니다.
우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을 부르는 것이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얻는 지름길임을 가르치십니다. 단, 제목을 불러도 자신의 생명 바깥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묘법이라 할 수 없고 일생성불은 이룰 수 없다고 훈계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문을 읽고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일까지도 전부 내 일념에 간직되는 공덕선근이다’ 하고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정토(淨土)와 예토(穢土)라도 다른 국토 두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사는 우리 마음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와 중생이라도 각각의 존재가 아니라 ‘깨닫느냐, 미혹하느냐’라는, 중생이 간직한 생명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미혹한 생명을 흐린 거울에, 깨달은 생명을 훤히 비추는 명경(明鏡)에 비유하셨습니다. 암경(闇鏡, 흐린 거울)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이,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이나 낮이나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창제에 힘써야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교시하셨습니다.
다음에 중생의 마음과 묘호렌게쿄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으로 나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묘법의 당체(當體)임을 깊이 확신하고 제목을 불러야 일생성불을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심을 품지 말고 일생성불하는 신심에 힘쓰라고 거듭 격려하며 이 어서를 끝맺으십니다.
일생성불초 어서전집 384쪽 3행 ~ 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_ 통 해
중생도 부처도 또한 이와 같다(둘의 구별은 없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부르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흐린 거울도 닦으면 반짝이는 구슬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중생의 일념은 무명에 싸여 미혹한 마음으로, 이를테면 아직 닦지 않은 거울이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을 여는 생명이 되고, 훤히 비추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서 밤이나 낮이나,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부리지 말고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으면 좋을까.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_ 어 구 해 설
【무명】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몽매한 충동.
【법성진여】 ‘법성(法性)’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부처가 깨달은 ‘본질’. ‘진여(眞如)’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함.
포인트강의
내 생명을 변혁하는 창제행을!
니치렌대성인불법은 ‘변혁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을 변혁해야 성불이라는, 생명의 근본적인 변혁도 이룰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생(범부)’과 ‘부처’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둘 사이에 구별은 없으며 중생과 부처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미혹’한 생명을 ‘깨달음’의 생명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변혁하는 요체가 바로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이 점을 이 어서에서는 거울의 비유로 알기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뒤덮여 고뇌하는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한 깨달음을 연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닦지 않은 흐린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훤히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끝까지 부를 때,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불식시키고 본디 갖추어진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이 생명을 연마하는 창제행에 두가지 면이 있다고 배견됩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첫째는 “깊이 신심을 일으켜”, 또 하나는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없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미혹인 무명과 싸우려면 신심을 깊이 일으키는 ‘용감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또 일성성불 하려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지속하는 신심’을 거듭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날마다 묘법을 낭랑하게 부르고 학회활동에 용감하게 힘써야만 자신의 생명이 최고로 연마됩니다. 그 생명은 맑게 닦인 명경처럼 가장 올바른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 우주관을 갖고 모든 사상(事象)을 적절하게 규명하고 무엇에도 지지 않고 가치 창조하는 지혜를 빛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 연마, 생명 변혁의 창제행을 철저하게 실천하여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 경애를 구축합시다!
일생성불초(一生成佛抄)
자, 생명을 단련하는 나날을
밝고 명랑하게!
배경과 대의
이 어서는 진필이 존재하지 않아서 집필 연대나 누구에게 보냈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1255년에 도키조닌에게 보내셨다고 전해집니다. 제목인 ‘일생성불(一生成佛)’은 범부가 일생 동안에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의의를 법리(法理)와 실천의 두가지 측면에서 밝히셨습니다.
우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제목을 부르는 것이 깨달음의 최고 경지를 얻는 지름길임을 가르치십니다. 단, 제목을 불러도 자신의 생명 바깥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묘법이라 할 수 없고 일생성불은 이룰 수 없다고 훈계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문을 읽고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일까지도 전부 내 일념에 간직되는 공덕선근이다’ 하고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정토(淨土)와 예토(穢土)라도 다른 국토 두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사는 우리 마음이 선이냐 악이냐에 따라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와 중생이라도 각각의 존재가 아니라 ‘깨닫느냐, 미혹하느냐’라는, 중생이 간직한 생명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미혹한 생명을 흐린 거울에, 깨달은 생명을 훤히 비추는 명경(明鏡)에 비유하셨습니다. 암경(闇鏡, 흐린 거울)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이,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이나 낮이나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창제에 힘써야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교시하셨습니다.
다음에 중생의 마음과 묘호렌게쿄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으로 나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묘법의 당체(當體)임을 깊이 확신하고 제목을 불러야 일생성불을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의심을 품지 말고 일생성불하는 신심에 힘쓰라고 거듭 격려하며 이 어서를 끝맺으십니다.
일생성불초 어서전집 384쪽 3행 ~ 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_ 통 해
중생도 부처도 또한 이와 같다(둘의 구별은 없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부르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흐린 거울도 닦으면 반짝이는 구슬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중생의 일념은 무명에 싸여 미혹한 마음으로, 이를테면 아직 닦지 않은 거울이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을 여는 생명이 되고, 훤히 비추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서 밤이나 낮이나,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부리지 말고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으면 좋을까.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_ 어 구 해 설
【무명】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몽매한 충동.
【법성진여】 ‘법성(法性)’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부처가 깨달은 ‘본질’. ‘진여(眞如)’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함.
포인트강의
내 생명을 변혁하는 창제행을!
니치렌대성인불법은 ‘변혁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을 변혁해야 성불이라는, 생명의 근본적인 변혁도 이룰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생(범부)’과 ‘부처’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둘 사이에 구별은 없으며 중생과 부처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미혹’한 생명을 ‘깨달음’의 생명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그렇게 변혁하는 요체가 바로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이 점을 이 어서에서는 거울의 비유로 알기 쉽게 가르치셨습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뒤덮여 고뇌하는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한 깨달음을 연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닦지 않은 흐린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훤히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끝까지 부를 때,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불식시키고 본디 갖추어진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또 이 생명을 연마하는 창제행에 두가지 면이 있다고 배견됩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첫째는 “깊이 신심을 일으켜”, 또 하나는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없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을 방해하는 근본적인 미혹인 무명과 싸우려면 신심을 깊이 일으키는 ‘용감한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또 일성성불 하려면 게으름 피우지 말고 ‘지속하는 신심’을 거듭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날마다 묘법을 낭랑하게 부르고 학회활동에 용감하게 힘써야만 자신의 생명이 최고로 연마됩니다. 그 생명은 맑게 닦인 명경처럼 가장 올바른 인생관, 사회관, 세계관, 우주관을 갖고 모든 사상(事象)을 적절하게 규명하고 무엇에도 지지 않고 가치 창조하는 지혜를 빛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 연마, 생명 변혁의 창제행을 철저하게 실천하여 그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는 절대적 행복 경애를 구축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