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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호 좌담회어서 홈페이지 강의 원고
관리자
2011-08-29
7,665
[9월 지구좌담회 어서 강의 <지묘법화문답초>]
안녕하십니까?
이번달 어서는 <지묘법화문답초>입니다.
이 어서는 1263년 대성인이 이즈유죄에서 귀환하신 뒤에 저술하셨거나 제자의 저작을 승인하셨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제호에도 있듯이 ‘묘호렌게쿄’를 ‘수지’함으로써 성불이라는 최고 경애를 열 수 있음을 ‘문답’ 형식으로 가르치신 어서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첫번째로, 인간으로서 생을 받기란 매우 드물며 게다가 불법을 듣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어떤 가르침을 수행해야 하는가, 그것은 법화경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번째로 법화경이 모든 경전 중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불설에 명백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이어 세번째 문답에서 법화경은 석존의 극설이며 ‘부처가 되는 진실한 길’을 설했다고 밝히셨습니다.
네번째 문답에서는, 법화경은 이전권교에서 성불할 수 없던 이승도 구제받는, 모든 사람을 성불시키는 가르침임을 말씀하십니다. 다섯번째 문답은 ‘이 법화경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반대로 ‘불신’은 부처가 내미는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므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히 법화경이 가장 뛰어나기에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도 으뜸이며 그 사람을 비방하는 행동은 법화경을 비방하는 것과 같으니 엄히 삼가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또 인생은 무상하다, 이 짧은 일생에서 세간적인 명성이나 이익을 탐내어 만심이나 아집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법화경을 끝까지 수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끝으로 이 현실세계는 번뇌의 불에 타고 있는 ‘화택’과 같아 부처가 사는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 덧없는 명성이나 이익에 집착하는 자신을 극복하고 묘법을 실천하며 남에게도 권하는 일이 바로 인간으로서 생을 받은 이 일생의 추억이 된다고 말씀하시고 이 어서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본 문 ] 지묘법화문답초 467쪽 16행∼18행
적광의 도읍이 아니고서는 어느 곳이나 모두 고이니라, 본각의 거처를 떠나서 무슨 일인들 즐거움이 되리오. 원컨대 ‘현세안온•후생선처’의 묘법을 수지하는 것만이 오로지 금생의 명문•후세의 농인이 되리라.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만이 금생 인계의 추억이 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통 해 ]
구원의 부처가 사는 영원한 불국토가 아니면 어느 곳이나 모두 괴로운 세계다. 생명에 본디 갖춰진 불계를 떠나서 무엇이 즐겁겠는가. 원하건대 “현세는 안온하고 내세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묘법을 수지하는 일만이 이 일생의 참된 명예며 내세의 길잡이다. 어쨌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하는 일이 바로 인간으로서 생을 받은 이 일생의 추억이 된다.
[ 어 구 해 설 ]
[적광의 도읍]이란 구원의 부처가 사는 영원한 불국토를 말합니다. 법화경 수량품에서는 이 현실세계가 구원의 부처가 사는 영원한 불국토며, 묘법을 강성히 믿음으로써 그 진실을 각지하고, 공덕을 받을 수 있다고 밝히십니다.
[본각의 거처]란 구원의 부처가 본디 갖춘 깨달음의 경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 본디 갖춰진 불계의 경지이기도 합니다.
[현세안온•후생선처]란 법화경 약초유품에 있는 글로, 법화경을 신수하면 현세는 안온한 경애가 되고, 내세에는 반드시 복운 가득한 경애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 어 서 해 설 ]
인간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난 이상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가, 그 근본 생활태도를 가르치신 어서입니다.
이 어서 앞부분에서는 “현실세계, 즉 삼계는 번뇌의 업화에 타고 있는 집, 즉 화택처럼 편안하지 못하다.”라는 법화경의 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적광의 도읍’이 아니라면 어느 곳이나 괴로움의 세계며, ‘본각의 거처’를 떠나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적광의 도읍’ ‘본각의 거처’는 구원의 부처가 사는 주소며 그 경지를 말하는데, 어딘가 먼 별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본디 갖춰진 ‘불계’, 즉 남묘호렌게쿄라는 청정하고 풍요로운 생명을 말합니다. 항상 거기에서 출발하여 거기로 되돌아가는 ‘생명의 의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 제목을 끝까지 불렀을 때 자기 생명에 갖춰진 불계를 열어서 나타내어 현실생활, 인간관계, 국토, 환경을 무한한 희망과 즐거움으로 빛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금세뿐 아니라 미래영겁에 걸친 행복경애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세에 묘법을 수지하는 일이 바로 진실한 영예며 내세의 길잡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묘법을 수지하는 것’인가. 그것은 행복의 대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하는 일이라고 대성인은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나날이 도전하는 광선유포운동이며 학회활동입니다.
스승과 함께, 동지와 함께 광포에 사는 우리는 인생에서 최고로 즐겁고 영원히 빛나는 추억을 새기고 있습니다.
[ 포 인 트 ]
첫째 포인트는 진정한 현세안온의 경애는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약동하는 모습에 있다는 점입니다.
‘안온’이라고 하면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고 무사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성인의 일생은 안온과는 거리가 먼 하루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대난과 연속 투쟁하는 나날이셨습니다.
노도와 같은 시련에도 필사적으로 신심 근본으로 투쟁하여 완전 승리하는 그 경애가 바로 진정한 안온입니다.
이케다 선생님도 소설 신∙인간혁명 ‘감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당히 인생에 승리할 수 있는 모습이 현세안온이라는 뜻입니다. 도중에는 아무리 파란만장할지라도 모두 극복하고 승리해서 말년에는 마음 깊이 현세안온한 인생이었노라고 실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평생 학회와 어본존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제목을 부르며 용감하게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야 합니다.
둘째 포인트는 묘법을 수지하는 것은 불법을 전해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며 묘법을 수지하는 최대의 의의는 자행화타의 실천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수필 <우리가 나아가는 승리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지도해주셨습니다.
절복은 어서에 씌어 있는 여설수행이며 “난사중의 난사”다. 그리고 정법을 들려주는 ‘문법하종’이나 상대방이 결의하는 ‘발심하종’도 공덕은 같다. 최고로 존귀한 ‘여래의 일’을 하고 있다. (중략)
기원하고 움직인 하루하루는 초조한 갈등마저도 모두 자기의 생명을 단련하는 시간들이다. 가슴속에 찬연히 빛나는 ‘신심의 토대’가 된다.
이 지도말씀 대로 상대가 신심을 하든 하지 않든 절복을 통해 상대의 마음에 부처의 씨앗을 심은 공덕은 똑같습니다.
불법을 전하는 자체가 ‘지묘법화’의 존귀한 실천입니다.
인류에 희망을 보내는 ‘대화 확대의 운동’을 그리고 ‘격려 운동’을 위풍당당히 전개해가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달 어서는 <지묘법화문답초>입니다.
이 어서는 1263년 대성인이 이즈유죄에서 귀환하신 뒤에 저술하셨거나 제자의 저작을 승인하셨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제호에도 있듯이 ‘묘호렌게쿄’를 ‘수지’함으로써 성불이라는 최고 경애를 열 수 있음을 ‘문답’ 형식으로 가르치신 어서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첫번째로, 인간으로서 생을 받기란 매우 드물며 게다가 불법을 듣기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어떤 가르침을 수행해야 하는가, 그것은 법화경이라고 강조하십니다. 두번째로 법화경이 모든 경전 중 가장 뛰어나다는 것은 불설에 명백하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이어 세번째 문답에서 법화경은 석존의 극설이며 ‘부처가 되는 진실한 길’을 설했다고 밝히셨습니다.
네번째 문답에서는, 법화경은 이전권교에서 성불할 수 없던 이승도 구제받는, 모든 사람을 성불시키는 가르침임을 말씀하십니다. 다섯번째 문답은 ‘이 법화경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하셨습니다. 반대로 ‘불신’은 부처가 내미는 손길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므로, 고뇌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특히 법화경이 가장 뛰어나기에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도 으뜸이며 그 사람을 비방하는 행동은 법화경을 비방하는 것과 같으니 엄히 삼가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또 인생은 무상하다, 이 짧은 일생에서 세간적인 명성이나 이익을 탐내어 만심이나 아집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법화경을 끝까지 수지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끝으로 이 현실세계는 번뇌의 불에 타고 있는 ‘화택’과 같아 부처가 사는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해야 한다, 덧없는 명성이나 이익에 집착하는 자신을 극복하고 묘법을 실천하며 남에게도 권하는 일이 바로 인간으로서 생을 받은 이 일생의 추억이 된다고 말씀하시고 이 어서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본 문 ] 지묘법화문답초 467쪽 16행∼18행
적광의 도읍이 아니고서는 어느 곳이나 모두 고이니라, 본각의 거처를 떠나서 무슨 일인들 즐거움이 되리오. 원컨대 ‘현세안온•후생선처’의 묘법을 수지하는 것만이 오로지 금생의 명문•후세의 농인이 되리라.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만이 금생 인계의 추억이 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통 해 ]
구원의 부처가 사는 영원한 불국토가 아니면 어느 곳이나 모두 괴로운 세계다. 생명에 본디 갖춰진 불계를 떠나서 무엇이 즐겁겠는가. 원하건대 “현세는 안온하고 내세는 좋은 곳에 태어난다.”는 묘법을 수지하는 일만이 이 일생의 참된 명예며 내세의 길잡이다. 어쨌든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하는 일이 바로 인간으로서 생을 받은 이 일생의 추억이 된다.
[ 어 구 해 설 ]
[적광의 도읍]이란 구원의 부처가 사는 영원한 불국토를 말합니다. 법화경 수량품에서는 이 현실세계가 구원의 부처가 사는 영원한 불국토며, 묘법을 강성히 믿음으로써 그 진실을 각지하고, 공덕을 받을 수 있다고 밝히십니다.
[본각의 거처]란 구원의 부처가 본디 갖춘 깨달음의 경지를 말합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에 본디 갖춰진 불계의 경지이기도 합니다.
[현세안온•후생선처]란 법화경 약초유품에 있는 글로, 법화경을 신수하면 현세는 안온한 경애가 되고, 내세에는 반드시 복운 가득한 경애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 어 서 해 설 ]
인간으로 태어나서 불법을 만난 이상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인생인가, 그 근본 생활태도를 가르치신 어서입니다.
이 어서 앞부분에서는 “현실세계, 즉 삼계는 번뇌의 업화에 타고 있는 집, 즉 화택처럼 편안하지 못하다.”라는 법화경의 글을 인용하셨습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적광의 도읍’이 아니라면 어느 곳이나 괴로움의 세계며, ‘본각의 거처’를 떠나서 무슨 즐거움이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적광의 도읍’ ‘본각의 거처’는 구원의 부처가 사는 주소며 그 경지를 말하는데, 어딘가 먼 별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본디 갖춰진 ‘불계’, 즉 남묘호렌게쿄라는 청정하고 풍요로운 생명을 말합니다. 항상 거기에서 출발하여 거기로 되돌아가는 ‘생명의 의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이 제목을 끝까지 불렀을 때 자기 생명에 갖춰진 불계를 열어서 나타내어 현실생활, 인간관계, 국토, 환경을 무한한 희망과 즐거움으로 빛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금세뿐 아니라 미래영겁에 걸친 행복경애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세에 묘법을 수지하는 일이 바로 진실한 영예며 내세의 길잡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묘법을 수지하는 것’인가. 그것은 행복의 대법인 남묘호렌게쿄를 나도 부르고 남에게도 권하는 일이라고 대성인은 가르치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나날이 도전하는 광선유포운동이며 학회활동입니다.
스승과 함께, 동지와 함께 광포에 사는 우리는 인생에서 최고로 즐겁고 영원히 빛나는 추억을 새기고 있습니다.
[ 포 인 트 ]
첫째 포인트는 진정한 현세안온의 경애는 광선유포를 위해 투쟁하는 약동하는 모습에 있다는 점입니다.
‘안온’이라고 하면 아무 일도 없이 평안하고 무사하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성인의 일생은 안온과는 거리가 먼 하루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대난과 연속 투쟁하는 나날이셨습니다.
노도와 같은 시련에도 필사적으로 신심 근본으로 투쟁하여 완전 승리하는 그 경애가 바로 진정한 안온입니다.
이케다 선생님도 소설 신∙인간혁명 ‘감투’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당당히 인생에 승리할 수 있는 모습이 현세안온이라는 뜻입니다. 도중에는 아무리 파란만장할지라도 모두 극복하고 승리해서 말년에는 마음 깊이 현세안온한 인생이었노라고 실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려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평생 학회와 어본존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제목을 부르며 용감하게 광선유포를 위해 꿋꿋이 살아야 합니다.
둘째 포인트는 묘법을 수지하는 것은 불법을 전해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에게도 권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시며 묘법을 수지하는 최대의 의의는 자행화타의 실천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수필 <우리가 나아가는 승리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지도해주셨습니다.
절복은 어서에 씌어 있는 여설수행이며 “난사중의 난사”다. 그리고 정법을 들려주는 ‘문법하종’이나 상대방이 결의하는 ‘발심하종’도 공덕은 같다. 최고로 존귀한 ‘여래의 일’을 하고 있다. (중략)
기원하고 움직인 하루하루는 초조한 갈등마저도 모두 자기의 생명을 단련하는 시간들이다. 가슴속에 찬연히 빛나는 ‘신심의 토대’가 된다.
이 지도말씀 대로 상대가 신심을 하든 하지 않든 절복을 통해 상대의 마음에 부처의 씨앗을 심은 공덕은 똑같습니다.
불법을 전하는 자체가 ‘지묘법화’의 존귀한 실천입니다.
인류에 희망을 보내는 ‘대화 확대의 운동’을 그리고 ‘격려 운동’을 위풍당당히 전개해가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