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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호 좌담회 어서 (법련내용, 홈페이지 강의원고)
관리자
2020-12-24
1,115
안녕하십니까?
이번달 어서는 <일생성불초>입니다.
<일생성불초>는 집필 연도와 수신인 등이 분명하지 않지만 1255년에 써서 도키 조닌에게 보내셨다고 전해집니다. 이 어서의 이름인 ‘일생성불’은 범부가 일생 동안에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의의를 법리와 실천면에서 밝히셨습니다.
대성인은 먼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일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나타내셨습니다. 다만 제목을 불러도 자기 생명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묘법이 아니며 일생성불은 이룰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어서 정토와 예토라 해도 두 국토가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와 중생이라고 해도 다른 존재가 아니라 깨달음과 미혹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미혹에 빠진 생명을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암경에, 깨달음을 얻은 생명을 잘 비추는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암경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게으름 없이 열심히 창제하면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본문] (어서전집 384쪽 3행 ~ 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통해]
중생이라 하고 부처라 해도 또한 마찬가지다(둘의 차이가 없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 한다. 예를 들어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으로 뒤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를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의 지혜가 되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또 게으름 없이 자기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어구해설]
<무명>은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 미혹, 어리석음으로, 일체의 번뇌를 만드는 근본입니다.
<법성진여>는 ‘법성’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그 자체이고 부처가 깨달은 본질입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합니다.
[포인트]
이 어서는 생명변혁의 실천인 창제행을 밝히신 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생’과 ‘부처’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본질적으로 둘에 차이가 없고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범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 변혁의 방도는 바로 묘법을 믿고 수지하는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으로 뒤덮인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한 깨달음의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잘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묘법에 대한 깊은 ‘신’으로 제목을 끝까지 부를 때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쫓아버리고 본디 갖춘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연마하는 수행에서 첫번째 요체는 ‘깊이 신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거듭 창제해도 의심을 일으킨다면 어본존의 공력이 충분히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묘법의 당체라고 믿고 ‘반드시 고난을 타개하겠다’는 강한 결의와 확신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두번째 요체는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라고 있듯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근행창제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지속하는 신심’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마음을 구축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이아몬드 원석’과 같은 범부의 생명도 갈고닦으면 반드시 눈부실 정도의 빛을 발합니다. 다이아몬드인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 대성인은 금강의 불신인 다이아몬드 그 자체이신 어본존을 남겨주셨습니다.
어본존을 ‘믿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으로 제목을 불렀을 때 범부의 생명이 자연히 닦여 불계의 빛을 발합니다. 그것이 일상에서 공덕이 되어 복운으로 나타납니다.”
영광의 창립 100주년을 목표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본존을 믿고 창제 근본으로 전진합시다.
감사합니다.
이번달 어서는 <일생성불초>입니다.
<일생성불초>는 집필 연도와 수신인 등이 분명하지 않지만 1255년에 써서 도키 조닌에게 보내셨다고 전해집니다. 이 어서의 이름인 ‘일생성불’은 범부가 일생 동안에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의의를 법리와 실천면에서 밝히셨습니다.
대성인은 먼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일이 최고의 깨달음을 얻는 지름길이라고 나타내셨습니다. 다만 제목을 불러도 자기 생명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묘법이 아니며 일생성불은 이룰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어서 정토와 예토라 해도 두 국토가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와 중생이라고 해도 다른 존재가 아니라 깨달음과 미혹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미혹에 빠진 생명을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암경에, 깨달음을 얻은 생명을 잘 비추는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암경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게으름 없이 열심히 창제하면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본문] (어서전집 384쪽 3행 ~ 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통해]
중생이라 하고 부처라 해도 또한 마찬가지다(둘의 차이가 없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 한다. 예를 들어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으로 뒤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를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의 지혜가 되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또 게으름 없이 자기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어구해설]
<무명>은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 미혹, 어리석음으로, 일체의 번뇌를 만드는 근본입니다.
<법성진여>는 ‘법성’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그 자체이고 부처가 깨달은 본질입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합니다.
[포인트]
이 어서는 생명변혁의 실천인 창제행을 밝히신 어서입니다.
일반적으로 ‘중생’과 ‘부처’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본질적으로 둘에 차이가 없고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범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 변혁의 방도는 바로 묘법을 믿고 수지하는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으로 뒤덮인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한 깨달음의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잘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묘법에 대한 깊은 ‘신’으로 제목을 끝까지 부를 때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쫓아버리고 본디 갖춘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연마하는 수행에서 첫번째 요체는 ‘깊이 신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거듭 창제해도 의심을 일으킨다면 어본존의 공력이 충분히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묘법의 당체라고 믿고 ‘반드시 고난을 타개하겠다’는 강한 결의와 확신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두번째 요체는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라고 있듯이 ‘지속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근행창제를 끊임없이 실천하는 ‘지속하는 신심’이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않는 마음을 구축합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이아몬드 원석’과 같은 범부의 생명도 갈고닦으면 반드시 눈부실 정도의 빛을 발합니다. 다이아몬드인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 대성인은 금강의 불신인 다이아몬드 그 자체이신 어본존을 남겨주셨습니다.
어본존을 ‘믿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으로 제목을 불렀을 때 범부의 생명이 자연히 닦여 불계의 빛을 발합니다. 그것이 일상에서 공덕이 되어 복운으로 나타납니다.”
영광의 창립 100주년을 목표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어본존을 믿고 창제 근본으로 전진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