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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호 좌담회 어서 (법련내용, 홈페이지 강의원고)
관리자
2016-03-28
3,487
2016년 4월 좌담회 어서 <일생성불초>
안녕하십니까?
이번달 어서는 <일생성불초> 입니다.
이 어서는 진필이 남아 있지 않아 집필하신 날짜와 수신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1255년에 쓰시어 도키조닌에게 주셨다고 전합니다.
제목의 ‘일생성불’은 범부가 일생 동안에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뜻을 법리와 실천면에서 밝히셨습니다.
우선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것이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직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제목을 불러도 자신의 생명 외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묘법이 아니며 일생성불은 이룰 수 없다고 훈계하십니다.
따라서 경문을 읽고 꽃을 올리고 향을 피우는 것도 모두 자기 일념에 간직하는 공덕선근이라고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정토와 예토라는 두 국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나 중생이라고 해도 다른 존재가 아니라 깨달음과 미혹에서 나오는 생명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미혹에 빠진 생명을 흐려서 사물이 비치지 않는 암경에, 깨달음의 생명을 잘 비치는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암경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이 신심을 깊이 일으켜 일야조모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창제하면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다음에 묘호렌게쿄와 중생 마음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로 나누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일생성불은 자신의 생명이 묘법의 당체임을 깊이 믿고 제목을 불러야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불신을 품지 말고 일생성불의 신심에 힘쓰도록 거듭 격려하시며 끝맺으셨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본 문 ] (어서전집 384쪽 3행~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통 해 ]
중생이라 하고 부처라고 해도 또한 같은 것이다(둘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고 한다. 예를 들면 흐려서 비치지 않는 거울도 닦으면 옥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의 지혜가 되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낮없이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자기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으면 좋을까.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 어 구 해설 ]
【무명】은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충동을 말합니다.
【법성진여】의 ‘법성’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자체, 부처가 깨달은 본질을 말합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합니다.
[ 포 인 트 ]
이 어서는 생명변혁의 구체적인 실천인 창제행을 밝히신 어서입니다.
보편적으로 ‘중생’과 ‘부처’는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양자는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서 볼 수 있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미혹’의 생명을 ‘깨달음’의 생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그 변혁의 주축이 되는 것이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덮여 고뇌에 빠진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하게 깨달은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흐려서 물건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잘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이와 같이 제목을 착실히 부르면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털어버리고 본디 갖추고 있는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연마하는 창제행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이 어서에서 대성인은 하나는 “깊이 신심을 일으켜” 또 하나는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을 막는 미혹인 무명과 싸우기 위해 깊은 신심을 일으키는 ‘용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생성불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속하는 신심’을 거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목은 ‘전진’하는 힘입니다. 제목은 ‘승리’하는 힘입니다. 모든 싸움은 우선 기원에서 시작합니다. 제목을 착실히 부르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어디까지나 일야조모로 끊임없이 제목을 부르며 생명을 연마해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인생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생명연마, 생명변혁의 제목을 끝까지 불러 인생을 승리합시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번달 어서는 <일생성불초> 입니다.
이 어서는 진필이 남아 있지 않아 집필하신 날짜와 수신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1255년에 쓰시어 도키조닌에게 주셨다고 전합니다.
제목의 ‘일생성불’은 범부가 일생 동안에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뜻을 법리와 실천면에서 밝히셨습니다.
우선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것이 최고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직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제목을 불러도 자신의 생명 외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묘법이 아니며 일생성불은 이룰 수 없다고 훈계하십니다.
따라서 경문을 읽고 꽃을 올리고 향을 피우는 것도 모두 자기 일념에 간직하는 공덕선근이라고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정토와 예토라는 두 국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차이가 나타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나 중생이라고 해도 다른 존재가 아니라 깨달음과 미혹에서 나오는 생명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미혹에 빠진 생명을 흐려서 사물이 비치지 않는 암경에, 깨달음의 생명을 잘 비치는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암경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이 신심을 깊이 일으켜 일야조모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창제하면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다음에 묘호렌게쿄와 중생 마음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로 나누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일생성불은 자신의 생명이 묘법의 당체임을 깊이 믿고 제목을 불러야 성취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불신을 품지 말고 일생성불의 신심에 힘쓰도록 거듭 격려하시며 끝맺으셨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본 문 ] (어서전집 384쪽 3행~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통 해 ]
중생이라 하고 부처라고 해도 또한 같은 것이다(둘의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고 한다. 예를 들면 흐려서 비치지 않는 거울도 닦으면 옥과 같이 보이는 것이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것을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의 지혜가 되는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밤낮없이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부리지 않고 자기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으면 좋을까.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닦는다고 한다.
[ 어 구 해설 ]
【무명】은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를 말합니다. 궁극적인 진실을 밝힌 묘법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 또 그 무지에서 일어나는 어두운 충동을 말합니다.
【법성진여】의 ‘법성’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자체, 부처가 깨달은 본질을 말합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합니다.
[ 포 인 트 ]
이 어서는 생명변혁의 구체적인 실천인 창제행을 밝히신 어서입니다.
보편적으로 ‘중생’과 ‘부처’는 멀리 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양자는 떨어진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서 볼 수 있는 ‘미혹’과 ‘깨달음’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미혹’의 생명을 ‘깨달음’의 생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그 변혁의 주축이 되는 것이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덮여 고뇌에 빠진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하게 깨달은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흐려서 물건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잘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이와 같이 제목을 착실히 부르면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털어버리고 본디 갖추고 있는 지혜가 빛나는 부처의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연마하는 창제행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이 어서에서 대성인은 하나는 “깊이 신심을 일으켜” 또 하나는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을 막는 미혹인 무명과 싸우기 위해 깊은 신심을 일으키는 ‘용감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생성불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속하는 신심’을 거듭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목은 ‘전진’하는 힘입니다. 제목은 ‘승리’하는 힘입니다. 모든 싸움은 우선 기원에서 시작합니다. 제목을 착실히 부르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우리도 어디까지나 일야조모로 끊임없이 제목을 부르며 생명을 연마해서 승리하고 또 승리하는 인생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생명연마, 생명변혁의 제목을 끝까지 불러 인생을 승리합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