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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호 좌담회어서 - 법련 내용과 동일
관리자
2012-12-24
8,071
2013년 1월호 지구 좌담회 어서
단월모답서
“현실사회에서 승리의 실증을!”
[배경과 대의]
이 어서는 1278년 4월,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이 미노부에서 쓰셨습니다.
제목이 ‘단월모’인 것처럼, 어느 단나(재가의 유력한 문하)에게 주신 편지이지만, 상세한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성인은 1260년에 <입정안국론>을 저술해 국주간효를 한 이후, 잇따라 박해를 받아 이즈유죄와 사도유죄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유죄가 사면되고 4년이 지난 1278년 대성인에게 세번째 유죄가 획책되고 있었습니다.
이 어서는 그 소식을 듣고 쓰신 답장입니다.
대성인은 세번째 유죄가 일어난다면 참으로 백천만억배 다행한 일이며, 대성인이 바로 진정한 법화경 행자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역병이나 노쇠로 덧없이 죽느니보다는 원컨대 국주의 박해를 받고 법화경을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는 각오를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이 단월에게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지금처럼 주군을 섬기는 일이 법화경의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사회에서 승리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어서전집 1295쪽 7-8행]
사관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의 치생산업은 모두 실상과 서로 위배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
[통 해]
주군을 섬기는 일이 법화경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시라. “모든 일반세간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 생업은 모두 실상(묘법)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경문에 설해져 있음은 바로 이것이다.
[어구해설]
사관(仕官)_ 귀인(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의 집에 종사하는 것. 주군(主君), 주인을 섬기는 일.
치생산업(治生産業)_ 생활을 꾸려나가는 생업.
실상(實相)_ 본디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 궁극적 진리인 묘법(妙法)을 가리킨다.
포인트 강의
현실을 떠나 불법(佛法)은 없다
니치렌대성인불법(日蓮大聖人佛法)은 ‘현실사회에서 싸워 승리’하는 불법입니다.
1271년에 일어난 다쓰노구치법난과 사도유죄 때 받은 박해는 대성인뿐 아니라 문하에게도 미쳤고, 제자들은 투옥되거나 소령을 몰수당해 많은 사람이 퇴전했습니다.
문하에 대한 냉혹한 환경은 1274년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뒤에도 계속됩니다.
이 어서를 받은 제자가 어떠한 고경에 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주군을 섬기고 법화경을 신앙하기 때문에 일어난 고난을 견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문하에게 이 어서 앞 부분에서는 대성인 자신이 의연한 태도로 법난(法難)에 맞서는 각오를 밝히십니다.
세번째 유죄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백천만억배 다행’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대난이 바로 법화경 행자의 증거다. 나도 싸우고 있다. 귀하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절대로 지면 안 된다.”
스승이 지켜보고 격려함으로써, 이 어서를 받은 제자도 용기 있는 신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게다가 대성인은 “사관(자신의 일)을 법화경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고뇌가 소용돌이치는 현실이라도, 그곳을 떠나서 불법은 없습니다.
자신의 사명이 있는 무대에서 악전고투하는 일이 바로 자신의 경애를 향상시키는 불도수행이 됩니다.
현실의 고난에는 신심근본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성인은 “현실사회의 모든 일은 실상과 위배하지 않는다. 묘법(妙法)과 합치한다.”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은 엄연한 사실을 지켜보면서 현실사회에, 자신의 생활에 승리의 실증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광선유포의 투쟁은 관념론이 아닙니다. 추상론이 아닙니다. 현실에 얼마만큼 행동하고, 기원하고, 대화하고 손을 썼는가. 현증(現證)은 어떤가. 그런 꾸준한 노력이 일체를 결정합니다.”
올해 ‘청년학회 승리의 해’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불법즉사회’ ‘신심즉생활’의 대도(大道)를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신입회원과 함께 하는 좌담회 어서]
“직장에서 빛나는 모습에
주위는 ‘태양’을 느낀다.”
— 이달에 배우는 어서는 매우 엄한 내용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사관’은 직업이고 ‘법화경’은 어본존이시다. 그러므로 직업을 어본존처럼 생각하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직업이 어본존인가요?
—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진지하게 일에 몰두하라는 지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다 선생님은 몇번이나 “신심은 한 사람 몫으로 좋다. 일은 세 사람 몫을 하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일은 세 사람 몫’입니까!
— 실은 마키구치(牧口) 선생님도 “세 사람 몫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하고 지도하셨습니다.
왜 세 사람 몫인가요?
—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이케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세배로 열심히 일했더니 직장에서 따돌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주위에 실증을 보이고 신뢰를 얻는 노력이 주변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답하고 ‘신뢰를 얻고 우정을 깊게 해 인간의 연대’를 넓혀가도록 조언을 했습니다. 즉 ‘세 사람 몫’이란 ‘신심의 실증을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주위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죠.
“저 사람은 어딘가 다르다.” “빛난다” 하며 우러러보는 모습에 모두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태양’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믿고 있는 법의 위대함 즉 신심의 힘을 증명하게 됩니다. 또 그 사람을 육성하는 학회의 선배와 동지 그리고 지도하는 스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증을 보이는 사람의 존재가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데 얼마나 통하는가. 얼마나 공덕이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일’은 집안일도 그렇고, 육아도 그렇고, 학생에게는 공부도 그렇습니다. 신심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직업이 없는 사람도 주위에 많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사회가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것만큼은 확신해주세요.
‘반드시 신심의 실증을 보일 장소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비롯한 벗과 사회를 행복해지게 하고, 신심과 스승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그 장소를 얻을 수 있나요?
— ‘일은 세 사람 몫’이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기에 먹을 것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의 지도입니다. 절대로 일정한 직업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지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은 세 사람 몫이라는 목표를 강조하셨습니다.
즉 실증을 보이려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제천이 지키지 않을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면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힘이 솟아나, 반드시 타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많은 학회원이 그 지도에 격려받고 밑바닥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 몫’이란 좀처럼 어렵습니다.
— 그러므로 ‘한 사람 몫’의 신심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신심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한 사람 몫’의 신심이 됩니까.
— 이케다 선생님이 “‘신심은 한 사람 몫’이라는 말은 결연히 ‘홀로 서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근행창제와 학회활동 그리고 연찬……. 모두 한번에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부터라도 좋습니다. 먼저 하나씩 행동합니다. 스스로 추진해 행동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역경에 도전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십시오. 반드시 인생을 여는 궤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단월모답서
“현실사회에서 승리의 실증을!”
[배경과 대의]
이 어서는 1278년 4월,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이 미노부에서 쓰셨습니다.
제목이 ‘단월모’인 것처럼, 어느 단나(재가의 유력한 문하)에게 주신 편지이지만, 상세한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대성인은 1260년에 <입정안국론>을 저술해 국주간효를 한 이후, 잇따라 박해를 받아 이즈유죄와 사도유죄를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유죄가 사면되고 4년이 지난 1278년 대성인에게 세번째 유죄가 획책되고 있었습니다.
이 어서는 그 소식을 듣고 쓰신 답장입니다.
대성인은 세번째 유죄가 일어난다면 참으로 백천만억배 다행한 일이며, 대성인이 바로 진정한 법화경 행자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역병이나 노쇠로 덧없이 죽느니보다는 원컨대 국주의 박해를 받고 법화경을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는 각오를 말씀하십니다.
끝으로 이 단월에게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지금처럼 주군을 섬기는 일이 법화경의 수행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사회에서 승리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어서전집 1295쪽 7-8행]
사관을 법화경이라고 생각하시라. “일체세간의 치생산업은 모두 실상과 서로 위배하지 않음”이란 이것이니라.
[통 해]
주군을 섬기는 일이 법화경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시라. “모든 일반세간의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 생업은 모두 실상(묘법)과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경문에 설해져 있음은 바로 이것이다.
[어구해설]
사관(仕官)_ 귀인(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의 집에 종사하는 것. 주군(主君), 주인을 섬기는 일.
치생산업(治生産業)_ 생활을 꾸려나가는 생업.
실상(實相)_ 본디 있는 그대로 진실한 모습. 궁극적 진리인 묘법(妙法)을 가리킨다.
포인트 강의
현실을 떠나 불법(佛法)은 없다
니치렌대성인불법(日蓮大聖人佛法)은 ‘현실사회에서 싸워 승리’하는 불법입니다.
1271년에 일어난 다쓰노구치법난과 사도유죄 때 받은 박해는 대성인뿐 아니라 문하에게도 미쳤고, 제자들은 투옥되거나 소령을 몰수당해 많은 사람이 퇴전했습니다.
문하에 대한 냉혹한 환경은 1274년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뒤에도 계속됩니다.
이 어서를 받은 제자가 어떠한 고경에 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주군을 섬기고 법화경을 신앙하기 때문에 일어난 고난을 견디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문하에게 이 어서 앞 부분에서는 대성인 자신이 의연한 태도로 법난(法難)에 맞서는 각오를 밝히십니다.
세번째 유죄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백천만억배 다행’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대난이 바로 법화경 행자의 증거다. 나도 싸우고 있다. 귀하도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절대로 지면 안 된다.”
스승이 지켜보고 격려함으로써, 이 어서를 받은 제자도 용기 있는 신심을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게다가 대성인은 “사관(자신의 일)을 법화경의 수행이라고 생각하시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고뇌가 소용돌이치는 현실이라도, 그곳을 떠나서 불법은 없습니다.
자신의 사명이 있는 무대에서 악전고투하는 일이 바로 자신의 경애를 향상시키는 불도수행이 됩니다.
현실의 고난에는 신심근본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성인은 “현실사회의 모든 일은 실상과 위배하지 않는다. 묘법(妙法)과 합치한다.”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이케다 SGI 회장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은 엄연한 사실을 지켜보면서 현실사회에, 자신의 생활에 승리의 실증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광선유포의 투쟁은 관념론이 아닙니다. 추상론이 아닙니다. 현실에 얼마만큼 행동하고, 기원하고, 대화하고 손을 썼는가. 현증(現證)은 어떤가. 그런 꾸준한 노력이 일체를 결정합니다.”
올해 ‘청년학회 승리의 해’에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불법즉사회’ ‘신심즉생활’의 대도(大道)를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신입회원과 함께 하는 좌담회 어서]
“직장에서 빛나는 모습에
주위는 ‘태양’을 느낀다.”
— 이달에 배우는 어서는 매우 엄한 내용입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은 “‘사관’은 직업이고 ‘법화경’은 어본존이시다. 그러므로 직업을 어본존처럼 생각하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직업이 어본존인가요?
—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진지하게 일에 몰두하라는 지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도다 선생님은 몇번이나 “신심은 한 사람 몫으로 좋다. 일은 세 사람 몫을 하라.”고 지도하셨습니다.
‘일은 세 사람 몫’입니까!
— 실은 마키구치(牧口) 선생님도 “세 사람 몫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세요.” 하고 지도하셨습니다.
왜 세 사람 몫인가요?
—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청년이 이케다 선생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세배로 열심히 일했더니 직장에서 따돌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주위에 실증을 보이고 신뢰를 얻는 노력이 주변 사람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답하고 ‘신뢰를 얻고 우정을 깊게 해 인간의 연대’를 넓혀가도록 조언을 했습니다. 즉 ‘세 사람 몫’이란 ‘신심의 실증을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주위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죠.
“저 사람은 어딘가 다르다.” “빛난다” 하며 우러러보는 모습에 모두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태양’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은 믿고 있는 법의 위대함 즉 신심의 힘을 증명하게 됩니다. 또 그 사람을 육성하는 학회의 선배와 동지 그리고 지도하는 스승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증을 보이는 사람의 존재가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데 얼마나 통하는가. 얼마나 공덕이 있는가.
다시 말하면 ‘일’은 집안일도 그렇고, 육아도 그렇고, 학생에게는 공부도 그렇습니다. 신심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장소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나…직업이 없는 사람도 주위에 많습니다.
— 그렇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을 정도로 사회가 매우 힘든 상황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것만큼은 확신해주세요.
‘반드시 신심의 실증을 보일 장소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비롯한 벗과 사회를 행복해지게 하고, 신심과 스승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그 장소를 얻을 수 있나요?
— ‘일은 세 사람 몫’이라는 말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기에 먹을 것조차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의 지도입니다. 절대로 일정한 직업이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지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은 세 사람 몫이라는 목표를 강조하셨습니다.
즉 실증을 보이려고 열심히 하는 사람을 제천이 지키지 않을 리 없습니다. 왜냐하면 광선유포를 추진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면 우리가 본디 지니고 있는 힘이 솟아나, 반드시 타개할 수 있습니다. 사실 참으로 많은 학회원이 그 지도에 격려받고 밑바닥 인생을 개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세 사람 몫’이란 좀처럼 어렵습니다.
— 그러므로 ‘한 사람 몫’의 신심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신심만 하고 있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무엇을 하면 ‘한 사람 몫’의 신심이 됩니까.
— 이케다 선생님이 “‘신심은 한 사람 몫’이라는 말은 결연히 ‘홀로 서는 것’이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자기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근행창제와 학회활동 그리고 연찬……. 모두 한번에 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부터라도 좋습니다. 먼저 하나씩 행동합니다. 스스로 추진해 행동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역경에 도전하는 용기를 불러일으키십시오. 반드시 인생을 여는 궤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