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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반좌담회 어서 아부쓰보어서 (阿佛房御書) 어서 1304쪽
송용훈
2006-06-11
5,872
배경과 대의
이 어서는 사도의 문하인 아부쓰보에게 주신 편지인데, 쓰신 시기는 1272년 3월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아부쓰보는 이름에서 볼 때 염불의 강신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대성인이 사도에 유배되어 계실 때 문답(問答)에 도전하여 패하고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성인이 가마쿠라로 돌아오실 때까지 약 2년 동안, 부인 센니치니와 함께 혼을 바쳐 대성인을 지키며 생활을 도왔습니다.
아부쓰보는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후에도 고령의 몸을 무릅쓰고 여러 번 미노부를 방문했습니다.
이 어서에서 대성인은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설하는 보탑의 의의를 밝히셨습니다.
보탑품 첫머리에서 칠보로 장식한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보여래가 나타나 법화경을 설하던 석존을 탑 안으로 초빙하여 허공회(虛空會)의 의식을 시작합니다.
아부쓰보는 공양물과 함께 보낸 편지에서 이 이상한 보탑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성인은 말법에 법화경을 수지한 자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자는 차별없이 자신의 몸이 보탑이며 그 보탑은 바로 남묘호렌게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아부쓰보 자신이 보탑이고 삼신즉일신(三身卽一身)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가르침을 깊이 믿고 제목을 부르는 사람이 보탑이라고 하시며, 아부쓰보 부부에게 보탑을 써서 나타낸 본존님을 하사하는 취지를 밝히시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부쓰보를 ‘북국의 도사’라고 부르시고, 지역 광포의 지도자로서 더욱 강한 신심을 관철하라고 격려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어서 1304쪽 6행~8행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法華經)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법화경의 제목(題目)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통해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신분의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몸이 보탑이고 또 그 사람의 몸이 다보여래다.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다.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 남묘호렌게쿄다.
어구해설
【보탑(寶塔)】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출현하여 촉루품 제22까지 허공(虛空)에 있었다는 다보의 탑을 말한다. 높이 500유순(由旬), 종과 횡이 각각 250유순으로 금・은・유리 등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 이 탑 속에 석가・다보의 이불(二佛)이 병좌(竝座)하고 대중도 공중에 떠서 허공회의 의식을 전개했다고 설하고 있다.
포. 인. 트. 강. 의.
내 생명이 바로 가장 존귀한 보탑
인간 생명의 무한한 존엄성과 가능성을 설해 밝힌 것이 법화경이고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입니다.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의 첫머리에서 지구의 3분의 1정도라는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출현했다고 설합니다.
그것은 금・은・유리 등 칠보(七寶)로 장식되어 대우주의 모든 보배를 수집한 듯한 장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보탑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아부쓰보의 의문에 대해, 말법에 묘법을 수지한 아부쓰보야말로 보탑이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우선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묘법을 신수(信受)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에 잠재하는 존귀한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몸은 한없이 존귀한 성불의 모습, 즉 보탑으로 빛납니다.
이어서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라고 말씀하셨듯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보탑이고 다보여래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전부 평등합니다.
또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라고 말씀하셨듯이 보탑이란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는 남묘호렌게쿄라는 근본의 법을 표현하고 있으며 대성인은 이 법을 본존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에게 ‘법화경을 수지한다’란 본존님을 신수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홍교하는 것입니다.
이케다 SGI회장은 “내 몸에서 보탑을 보고 내 벗에게서 보탑을 봅니다. 그리고 보탑 또 보탑의 숲을 이루어 내 지역을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구를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지역에 광선유포의 보탑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고 ‘영원한 금자탑’을 남기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을 ‘보탑’으로 빛내는 격려의 대화 운동에 적극 참여합시다.
새벗과 나누는 어서 이야기
‘아부쓰보어서 阿佛房御書 (어서 1304쪽)’
제목을 부르는 자신이 바로 보탑!
소중한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는 이달의 어서, 즐겁게 공부하셨나요? 청년부 새벗과 함께 이번 어서에 대한 궁금증을 함께 풀어 봅니다.
‘보탑’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법화경에 ‘견보탑품 제11’이라는 장(章)이 있는데, 그 첫머리에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중에 떠서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대단한 것은 그 크기입니다. 높이가 500유순, 종횡이 각각 250유순이나 된다고 합니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에서 사용한 거리의 단위로서 왕이 군대를 이끌고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가령 하루에 10킬로미터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500유순이 5,000킬로미터에 해당하니 얼마나 거대한 보탑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것은 크기뿐 아니라, 금과 은, 유리, 진주 등 칠보(七寶)로 장식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보석만 봐도 황홀해집니다. 그것이 거대한 보탑이니 장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쓰여 있나요? 법화경은 SF(공상과학소설) 같군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부쓰보도 법화경에서 설한 보탑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보탑은 ‘촉루품 제22’의 설법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공간에 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부쓰보는 ‘틀림없이 무슨 의미가 있다. 도대체 보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대성인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대성인은 보탑의 의의를 단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보탑은 아부쓰보 당신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참으로 놀랐을 것입니다. 설마 그런 답변이 오리라고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보탑이란 인간의 생명에 잠재하는 불계의 생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만큼 존귀하고 위대하다’라는 것이 법화경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존귀하다고요? 언제나 사소한 일로 고민만 하고 있고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대하다고 격려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보탑의 의의를 사상으로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실감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보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견보탑(見寶塔)’이란 ‘보탑의 출현’이라는 뜻인데, 이에 대해 대성인은 석존의 제자들이 법화경을 듣고 자신의 불성을 확신하며 그것을 보탑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해석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불계를 ‘본다’, 즉 확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최고로 존귀한 자기 생명의 모습을 비추어 내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자신의 보탑을 비추어 내는 명경(明鏡)으로서 본존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본존님을 믿고 스스로 제목을 부르고 사람들에게 넓히는 가운데 자신이 보탑임을 확신합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견보탑이니라”(어서 739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하튼 보탑은 자신의 생명의 존엄을 설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감하기 위해 불법이 있습니다.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마음은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비록 평범할지라도 한사람 한사람이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월간법련 : 06/06/01 200606호
이 어서는 사도의 문하인 아부쓰보에게 주신 편지인데, 쓰신 시기는 1272년 3월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아부쓰보는 이름에서 볼 때 염불의 강신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대성인이 사도에 유배되어 계실 때 문답(問答)에 도전하여 패하고 대성인의 문하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성인이 가마쿠라로 돌아오실 때까지 약 2년 동안, 부인 센니치니와 함께 혼을 바쳐 대성인을 지키며 생활을 도왔습니다.
아부쓰보는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후에도 고령의 몸을 무릅쓰고 여러 번 미노부를 방문했습니다.
이 어서에서 대성인은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설하는 보탑의 의의를 밝히셨습니다.
보탑품 첫머리에서 칠보로 장식한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솟아 나와 공중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다보여래가 나타나 법화경을 설하던 석존을 탑 안으로 초빙하여 허공회(虛空會)의 의식을 시작합니다.
아부쓰보는 공양물과 함께 보낸 편지에서 이 이상한 보탑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성인은 말법에 법화경을 수지한 자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남묘호렌게쿄를 부르는 자는 차별없이 자신의 몸이 보탑이며 그 보탑은 바로 남묘호렌게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아부쓰보 자신이 보탑이고 삼신즉일신(三身卽一身)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 가르침을 깊이 믿고 제목을 부르는 사람이 보탑이라고 하시며, 아부쓰보 부부에게 보탑을 써서 나타낸 본존님을 하사하는 취지를 밝히시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부쓰보를 ‘북국의 도사’라고 부르시고, 지역 광포의 지도자로서 더욱 강한 신심을 관철하라고 격려하시고 있습니다.
본문
어서 1304쪽 6행~8행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법화경(法華經)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寶塔)은 없느니라. 만약 그렇다면 귀천상하(貴賤上下)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는 자신이 보탑이고 자신이 또한 다보여래(多寶如來)이니라.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 법화경의 제목(題目)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한 남묘호렌게쿄이니라.
통해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다. 만약 그렇다면 신분의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몸이 보탑이고 또 그 사람의 몸이 다보여래다.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다. 법화경의 제목이 보탑이고 보탑이 또 남묘호렌게쿄다.
어구해설
【보탑(寶塔)】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에서 출현하여 촉루품 제22까지 허공(虛空)에 있었다는 다보의 탑을 말한다. 높이 500유순(由旬), 종과 횡이 각각 250유순으로 금・은・유리 등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 이 탑 속에 석가・다보의 이불(二佛)이 병좌(竝座)하고 대중도 공중에 떠서 허공회의 의식을 전개했다고 설하고 있다.
포. 인. 트. 강. 의.
내 생명이 바로 가장 존귀한 보탑
인간 생명의 무한한 존엄성과 가능성을 설해 밝힌 것이 법화경이고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입니다.
법화경 견보탑품 제11의 첫머리에서 지구의 3분의 1정도라는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출현했다고 설합니다.
그것은 금・은・유리 등 칠보(七寶)로 장식되어 대우주의 모든 보배를 수집한 듯한 장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보탑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라는 아부쓰보의 의문에 대해, 말법에 묘법을 수지한 아부쓰보야말로 보탑이라고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대성인은 우선 “말법에 들어와서 법화경을 수지하는 남녀의 모습 이외에 보탑은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묘법을 신수(信受)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에 잠재하는 존귀한 불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때 내 몸은 한없이 존귀한 성불의 모습, 즉 보탑으로 빛납니다.
이어서 “귀천상하를 가리지 않고”라고 말씀하셨듯이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보탑이고 다보여래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도 없고 전부 평등합니다.
또 “묘호렌게쿄 이외에 보탑은 없으며”라고 말씀하셨듯이 보탑이란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는 남묘호렌게쿄라는 근본의 법을 표현하고 있으며 대성인은 이 법을 본존님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우리에게 ‘법화경을 수지한다’란 본존님을 신수하고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며 홍교하는 것입니다.
이케다 SGI회장은 “내 몸에서 보탑을 보고 내 벗에게서 보탑을 봅니다. 그리고 보탑 또 보탑의 숲을 이루어 내 지역을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지구를 장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지역에 광선유포의 보탑을 세우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했다고 ‘영원한 금자탑’을 남기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을 ‘보탑’으로 빛내는 격려의 대화 운동에 적극 참여합시다.
새벗과 나누는 어서 이야기
‘아부쓰보어서 阿佛房御書 (어서 1304쪽)’
제목을 부르는 자신이 바로 보탑!
소중한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는 이달의 어서, 즐겁게 공부하셨나요? 청년부 새벗과 함께 이번 어서에 대한 궁금증을 함께 풀어 봅니다.
‘보탑’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법화경에 ‘견보탑품 제11’이라는 장(章)이 있는데, 그 첫머리에 거대한 보탑이 대지에서 갑자기 나타나 공중에 떠서 머물러 움직이지 않았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대단한 것은 그 크기입니다. 높이가 500유순, 종횡이 각각 250유순이나 된다고 합니다.
‘유순’이란 고대 인도에서 사용한 거리의 단위로서 왕이 군대를 이끌고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가령 하루에 10킬로미터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500유순이 5,000킬로미터에 해당하니 얼마나 거대한 보탑인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대단한 것은 크기뿐 아니라, 금과 은, 유리, 진주 등 칠보(七寶)로 장식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보석만 봐도 황홀해집니다. 그것이 거대한 보탑이니 장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쓰여 있나요? 법화경은 SF(공상과학소설) 같군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부쓰보도 법화경에서 설한 보탑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보탑은 ‘촉루품 제22’의 설법이 끝날 때까지 오랫동안 공간에 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부쓰보는 ‘틀림없이 무슨 의미가 있다. 도대체 보탑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고 대성인에게 질문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대성인은 보탑의 의의를 단적으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보탑은 아부쓰보 당신을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참으로 놀랐을 것입니다. 설마 그런 답변이 오리라고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보탑이란 인간의 생명에 잠재하는 불계의 생명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인간은 그만큼 존귀하고 위대하다’라는 것이 법화경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존귀하다고요? 언제나 사소한 일로 고민만 하고 있고 남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대하다고 격려해 주는 것은 기쁘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보탑의 의의를 사상으로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실감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보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견보탑(見寶塔)’이란 ‘보탑의 출현’이라는 뜻인데, 이에 대해 대성인은 석존의 제자들이 법화경을 듣고 자신의 불성을 확신하며 그것을 보탑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해석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신의 불계를 ‘본다’, 즉 확신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최고로 존귀한 자기 생명의 모습을 비추어 내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자신의 보탑을 비추어 내는 명경(明鏡)으로서 본존님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그 본존님을 믿고 스스로 제목을 부르고 사람들에게 넓히는 가운데 자신이 보탑임을 확신합니다. 대성인은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하는 자는 견보탑이니라”(어서 739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여하튼 보탑은 자신의 생명의 존엄을 설하고 있으며 그것을 실감하기 위해 불법이 있습니다. 자신의 위대함을 깨닫기 위해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라고 자신을 비하하는 마음은 깨끗이 씻어 버려야 합니다. 비록 평범할지라도 한사람 한사람이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법화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월간법련 : 06/06/01 20060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