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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좌담회 어서 <일생성불초> 이번달 어서는 <일생성불초>입니다.
<일생성불초>는 1255년, 대성인이 서른네살 때 시모우사 지방에 사는 도키 조닌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제목에 나오는 ‘일생성불’은 범부가 이 일생 동안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의의에 관해 법리와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밝히셨습니다.
먼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일이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지름길이라고 나타냈습니다. 다만, 제목을 부른다 해도 자신의 생명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묘법이 아니므로 일생성불을 이룰 수 없다고 훈계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문을 읽고,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일마저도 모두 자기 일념에 갖추게 되는 공덕선근이라고 여겨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정토와 예토라 해도 각각 다른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와 중생이라 해도 각각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 상태가 깨달음인지 혹은 미혹인지로 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미혹의 생명을 흐릿한 암경에, 깨달음의 생명을 잘 비추는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암경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없이 창제에 힘쓰면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이어서 묘호렌게쿄와 중생의 마음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로 나누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묘법의 당체라고 깊이 믿으며 제목을 부르는 곳에 일생성불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불신하는 마음 없이 일생성불의 신심에 힘쓰라고 거듭 격려하시고 이 어서를 끝맺었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본 문 ] (어서전집 384쪽 3행 ~ 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통 해 ]
중생이라 하고 부처라 해도 또한 마찬가지다(둘의 차이가 없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 한다. 예를 들어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의 미혹으로 뒤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를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의 지혜인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또한 게으름 없이 자기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이를 닦는다고 한다.
[ 어 구 해 설 ]
<무명>은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 미혹,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일체의 번뇌를 만드는 근본입니다.
<법성진여>의 ‘법성’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그 자체이고 부처가 얻은 깨달음의 본질입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합니다.
[ 포 인 트 ]
일반적으로 ‘중생(범부)’과 ‘부처’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둘에 차이가 없고 중생의 생명 상태가 ‘미혹’인지 혹은 ‘깨달음’인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혹’의 생명을 ‘깨달음’의 생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그 변혁의 핵심이 바로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뒤덮여 고뇌하는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한 깨달음을 얻은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닦지 않아 흐릿한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선명히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를 때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쫓아버리고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연마하는 수행의 요체로서 대성인은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미혹인 무명과 싸우기 위해서는 깊이 신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의심을 품는다면 어본존의 공력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묘법의 당체라고 믿고 강한 결의와 확신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또 일생성불을 위해서는 근행창제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이 ‘지속하는 신심’의 실천이 바로 고난에 지지 않는 마음을 만듭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의 법리에 비춰 머지않아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어본존을 의심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무의왈신’의 신심을 관철하기 바랍니다. 불신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적인 미혹이며 원품의 무명입니다. 그것은 불안을 유발하고 자신을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 자신의 마음과 싸우는 것이 신심입니다. 그 미혹의 마음을 물리치고 극복하는 힘이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제목 제일의 사람이 바로 진정한 용자입니다.” (신인간혁명 17권 322쪽)
우리는 창제근본으로 자신의 생명을 닦아 자타 함께 행복을 만드는 대화를 넓혀갑시다.
<일생성불초>는 1255년, 대성인이 서른네살 때 시모우사 지방에 사는 도키 조닌에게 보내신 편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제목에 나오는 ‘일생성불’은 범부가 이 일생 동안 성불한다는 뜻입니다.
이 어서에서는 일생성불의 요체인 ‘창제행’의 의의에 관해 법리와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밝히셨습니다.
먼저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르는 일이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지름길이라고 나타냈습니다. 다만, 제목을 부른다 해도 자신의 생명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면 묘법이 아니므로 일생성불을 이룰 수 없다고 훈계하셨습니다.
따라서 경문을 읽고, 꽃을 바치고, 향을 피우는 일마저도 모두 자기 일념에 갖추게 되는 공덕선근이라고 여겨 신심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정토와 예토라 해도 각각 다른 국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우리 마음의 선악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와 중생이라 해도 각각 다른 존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 상태가 깨달음인지 혹은 미혹인지로 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미혹의 생명을 흐릿한 암경에, 깨달음의 생명을 잘 비추는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암경도 닦으면 명경이 되듯,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게으름 없이 창제에 힘쓰면 부처의 경애를 나타낼 수 있다고 밝히셨습니다.
이어서 묘호렌게쿄와 중생의 마음의 관계를 ‘묘’ ‘호’ ‘렌게’ ‘쿄’로 나누어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이 묘법의 당체라고 깊이 믿으며 제목을 부르는 곳에 일생성불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끝으로 불신하는 마음 없이 일생성불의 신심에 힘쓰라고 거듭 격려하시고 이 어서를 끝맺었습니다. 그럼 [본문]을 함께 읽겠습니다.
[ 본 문 ] (어서전집 384쪽 3행 ~ 6행)
중생이라 함도 부처라 함도 또한 이와 같으니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이름하고 깨달을 때는 부처라 이름했느니라. 비유컨대 암경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도 일념무명의 미심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의 명경이 되느니라.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 닦을지어다. 어떻게 닦는가 하면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봉창함을 이를 닦는다고 하느니라.
이어서 [통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 통 해 ]
중생이라 하고 부처라 해도 또한 마찬가지다(둘의 차이가 없다). 미혹할 때는 중생이라 하고 깨달았을 때는 부처라 한다. 예를 들어 흐려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하는 거울도 닦으면 옥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 범부의) 무명이라는 근본의 미혹으로 뒤덮인 생명은 닦지 않은 거울과 같다. 이를 닦으면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의 지혜인 명경이 된다. 깊이 신심을 일으켜 아침저녁으로 또한 게으름 없이 자기 생명을 닦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가. 오직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것을 이를 닦는다고 한다.
[ 어 구 해 설 ]
<무명>은 생명의 근원적인 무지, 미혹,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일체의 번뇌를 만드는 근본입니다.
<법성진여>의 ‘법성’은 만물을 꿰뚫는 근본법 그 자체이고 부처가 얻은 깨달음의 본질입니다. ‘진여’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말합니다.
[ 포 인 트 ]
일반적으로 ‘중생(범부)’과 ‘부처’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둘에 차이가 없고 중생의 생명 상태가 ‘미혹’인지 혹은 ‘깨달음’인지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미혹’의 생명을 ‘깨달음’의 생명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요. 그 변혁의 핵심이 바로 남묘호렌게쿄의 ‘창제행’입니다.
대성인은 무명이라는 근본적인 미혹에 뒤덮여 고뇌하는 생명을 ‘닦지 않은 거울’에, 진실한 깨달음을 얻은 생명을 ‘명경’에 비유하셨습니다.
닦지 않아 흐릿한 거울도 닦으면 모든 것을 선명히 비추는 명경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남묘호렌게쿄의 제목을 부를 때 우리 생명이 연마되어 무명을 쫓아버리고 본디 갖추고 있는 부처의 생명을 열어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 생명을 연마하는 수행의 요체로서 대성인은 “깊이 신심을 일으켜” “일야조모로 또한 게으름 없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불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미혹인 무명과 싸우기 위해서는 깊이 신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의심을 품는다면 어본존의 공력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묘법의 당체라고 믿고 강한 결의와 확신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또 일생성불을 위해서는 근행창제를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이 ‘지속하는 신심’의 실천이 바로 고난에 지지 않는 마음을 만듭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법의 법리에 비춰 머지않아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은 절대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어본존을 의심하지 말고 마지막까지 ‘무의왈신’의 신심을 관철하기 바랍니다. 불신이라는 것은 생명의 근본적인 미혹이며 원품의 무명입니다. 그것은 불안을 유발하고 자신을 절망으로 몰아넣습니다. 그런 자신의 마음과 싸우는 것이 신심입니다. 그 미혹의 마음을 물리치고 극복하는 힘이 제목입니다. 그러므로 제목 제일의 사람이 바로 진정한 용자입니다.” (신인간혁명 17권 322쪽)
우리는 창제근본으로 자신의 생명을 닦아 자타 함께 행복을 만드는 대화를 넓혀갑시다.